보초병이나 운전병, 요리사들도 수술을 도왔던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1953)원본 출처: 노르웨이참전용사협회, 주한 노르웨이 대사관
6·25전쟁에서의 의료지원, 노르매쉬(NORMASH)
노르웨이 이동 외과 병원인 '노르매쉬 (Norwegian Mobile Army Surgical Hospital, NORMASH)'는 1951년부터 1954년까지 한국 전쟁에서 운영됐던 노르웨이의 야전 병원입니다. 노르매쉬는 최전방 지역에서 활동하며, 전쟁 중 군인들과 민간인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한국은 한국인의 생명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여한 노르매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한국지원 결의에 찬성하는 노르웨이 대표(1950-06-27)원본 출처: 유엔 포토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와 노르웨이
1950년 6월 27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남침을 규탄하고 평화 회복이라는 목표 아래 한국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발표하였습니다. 노르웨이는 이 결의안 채택을 지지하고 찬성하였습니다.
한국으로 파견되기 전 적십자 야전병원을 방문한 호쿤 7세 노르웨이 국왕(1950)원본 출처: 노르웨이참전용사협회, 주한 노르웨이 대사관
노르웨이의 의료 지원 결정
유엔의 협력 요청에 대해 노르웨이는 적십자를 통하여 '노르웨이 육군 이동외과 병원인 노르매쉬(Norwegian Mobile Army Surgical Hospital, NORMASH)'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51년 5월, 83명의 의무 및 행정요원들과 60개의 병상 규모로 구성된 노르매쉬가 한국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캠프 입구에 세워진 커다란 NORMASH 표지판(1951)원본 출처: 노르웨이참전용사협회, 주한 노르웨이 대사관
한국에서의 개원
1951년 7월, 노르매쉬는 의정부 캠프에서 정식으로 개원하면서 본격적으로 의료지원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사과나무정원’으로 불렸던 의정부 주둔 시기의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1951)원본 출처: 노르웨이참전용사협회, 주한 노르웨이 대사관
노르매쉬의 의정부 캠프
사과나무 숲 사이에 위치하여 '사과나무 정원'으로 불렸던 의정부 캠프는 X-RAY실과 외과수술실 등 야전 의료활동에 필요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동두천으로 이동하여 최전방 가까이에 위치한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1952)원본 출처: 노르웨이참전용사협회, 주한 노르웨이 대사관
동두천으로 이동하다
1952년 7월, 의정부에 주둔하고 있었던 노르매쉬는 38도선 우측 방면 동두천으로 캠프를 이동하였습니다.
동두천 캠프 내에 위치한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 정문과 초소(1952)원본 출처: 노르웨이참전용사협회, 주한 노르웨이 대사관
최전선에서의 구급호송
동두천에 주둔하면서 노르매쉬는 최전선에 있는 야전 이동외과 병원으로 전장에서의 부상병들에 대한 구급호송을 담당하였습니다.
다양한 종류의 차량 23대를 보유한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 수송대(1952)원본 출처: 노르웨이참전용사협회, 주한 노르웨이 대사관
노르매쉬 수송대의 규모와 임무
노르매쉬 수송대는 앰뷸런스 및 수송트럭, 지프 등 다양한 종류의 차량 23대를 보유하였으며 이를 통해 부상병들에 대한 신속한 의료활동을 지원하였습니다.
수술 대기 텐트에 누워있는 부상병들(1952)원본 출처: 트론헤임 시립 기록관
최전방 부상병들을 돌보다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일진일퇴가 거듭되었던 치열한 전장에서 수많은 부상병들이 속출하였는데, 최전방에 있던 노르매쉬는 응급호송을 통해 부상병들의 치료를 담당하였습니다.
수술을 집도하고 있는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 의사(1952)원본 출처: 노르웨이참전용사협회, 주한 노르웨이 대사관
전장에서의 외상센터
노르매쉬는 긴급후송된 부상병들의 응급진료 뿐만이 아니라 심각한 외상에 대한 처치 및 시술을 통해 부상병들의 소생 및 회복에 기여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의료활동으로 인해 노르매쉬에서의 부상병 생존율은 98.8%에 이르렀습니다.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의 치료를 받고 생존한 환자(98.8% 생존율 기록)(1952)원본 출처: 노르웨이참전용사협회, 주한 노르웨이 대사관
생사의 갈림길에서 발휘된 응급진료
치열한 전투에서 입은 부상은 언제 부상병의 목숨을 앓아갈지 모르는 치명적인 위협이었습니다. 노르매쉬는 긴급후송된 부상병들에게 응급진료를 통해 생사의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보초병이나 운전병, 요리사들도 수술을 도왔던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1953)원본 출처: 노르웨이참전용사협회, 주한 노르웨이 대사관
밤낮을 가리지 않았던 의료활동
전쟁 중 노르매쉬는 총 9만 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하였습니다. 치열한 전투로 인해 긴급후송된 부상병들이 급증할 경우, 노르매쉬는 보초병이나 운전병, 심지어 요리사들까지도 동원되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의료지원활동을 수행하였습니다.
수술 후 회복실 텐트에 있는 군인들(1952)원본 출처: 트론헤임 시립 기록관
아군 부상병들의 목숨을 구하다
노르매쉬가 치료했던 환자들 중 14,755명이 입원치료를 받았으며, 부상병의 약 80%는 치료 이후 부대에 복귀하여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 환자들(1953)원본 출처: 노르웨이참전용사협회, 주한 노르웨이 대사관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았던 인도적인 의료활동
노르매쉬는 유엔군과 국군의 부상병들 뿐만 아니라 적군인 북한군과 중국군의 포로들도 치료하였습니다. 노르매쉬에게 치료받은 적군 포로들은 172명이었습니다.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의 군용 구급차 호송대(1954)원본 출처: 노르웨이참전용사협회, 주한 노르웨이 대사관
정전, 그리고 노르매쉬의 철수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나서도 노르매쉬는 의료지원활동을 수행하다 1954년 10월 철수하였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노르매쉬에는 총 623명의 의료 및 행정 인력들이 파견되었으며, 3명이 전사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부상병 이외에도 민간인들을 진료하는 등 한국에 대한 인도적인 의료지원활동에 헌신하였습니다.
노르매쉬의 헌신적인 의료지원은 6·25 전쟁에서 노르웨이가 한국의 평화 회복에 기여한 우정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기획: 진영기
편집·진행: 정서희
사진협조: 주한노르웨이대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