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한국의 5대 궁궐

서울에 위치한 조선과 대한제국의 5대 고궁으로 가상현실 여행을 떠나보세요

경복궁 근정전국립고궁박물관

궁궐은 정치, 외교, 문화의 중심이자 왕실 가족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한 나라의 도성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였습니다. 조선은 유교적 정치이념과 풍수지리 사상에 바탕하여 수도와 궁궐터를 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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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수도인 한양은 백악산, 목멱산, 타락산, 인왕산을 경계로 하고 있습니다. 백악산 아래 법궁인 경복궁 이외의 다른 궁궐들도 이후에 조성되었으며, 왕은 시대적 상황이나 필요에 따라 여러 궁궐을 옮겨 가며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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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인 경복궁입니다. 1553년 대화재로 주요 전각들이 소실되고 난 후 재건되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다시 모두 소실되어 오랜 기간 터만 남아있었으며 1867년에 재건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전각들이 철거되는 등 수난을 겪다가 1990년도 부터 복원 정화 사업이 추진되어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을 차례로 지나면 근정전이 나옵니다. 그 뒤로 편전인 사정전, 침전인 강녕전과 교태전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동쪽으로 왕세자의 처소인 자선당과 대비의 처소인 자경전이 위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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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 마당 가운데 국왕이 다니는 어도와 신하가 다니는 신도가 있고 그 양옆에는 품계석이 있어 동쪽에는 문관이, 서쪽에는 무관이 섰습니다. 마당은 울퉁불퉁하고 거친 박석으로 만들어 눈부심을 막아주고 미끄러 지지 않도록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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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을 높이기 위해 마련된 넓은 기단 형식의 대를 월대라고 부릅니다. 월대로 오르는 계단 가운데에 용이나 봉황이 조각된 경사진 판석 위로는 국왕의 가마가 지납니다. 근정전의 월대 난간에는 상서로운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잡상(雜像)(1897년)국립고궁박물관

전각의 지붕에는 재앙을 막고자 흙으로 만든 동물 형상의 잡상을 올렸습니다. 잡상은 손오공 등 서유기의 등장인물에서 유래하였으며 그 수는 전각마다 다른데, 경회루에는 궁궐 건물 중 가장 많은 11개의 잡상이 있습니다.

경복궁 근정전 당가(2003)국립고궁박물관

외관은 2층이지만 내부는 높은 천장이 있는 통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북쪽 중앙에 국왕의 의자인 어좌가 있습니다. 어좌의 붉은색과 금으로 된 용장식은 국왕을 상징합니다. 뒤쪽 병풍에는 해와 달, 다섯 산봉우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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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청궁은 경복궁 속의 또 다른 궁으로, 1873년 고종이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정치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만든 공간입니다. 1884년부터 고종이 기거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약 10년간 외교 활동의 주무대가 됩니다. 고종은 이 기간 동안 신문물을 수용하고 근대화를 도모했습니다. 고종은 장안당에서, 명성황후는 곤녕합에서 생활했는데, 1895년 일본 공사관 직원, 일본 군인 등이 반일 세력의 중심인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시신을 녹산에서 불태운 ‘을미사변’이 이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이후 늘 신변의 위협에 시달리던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고(아관파천), 서재였던 관문각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은 모두 1909년 헐렸습니다. 현재의 모습은 2007년 복원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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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옥재는 팔우정, 협길당과 복도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전각으로 황실 도서관이자 외국 사절의 접견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가운데의 집옥재는 청과 서양의 양식으로, 동쪽의 협길당은 조선의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서쪽의 팔우정은 청 양식으로 지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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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761인 향원정은 정육각형 모양의 2층 정자로1867 ~ 1873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됩니다. 연못 안 인공섬에 지어져 건청궁에서부터 취향교라는 다리로 연결되는데 고종은 이곳에서 종종 산책을 즐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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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원지의 물은 북악산에서 흘러내린 지하수에서 시작됩니다. 북쪽 호안가에 정석을 놓고 샘 주위에 판석을 깔아 샘물을 유입시키는 시설을 마련하였습니다. 이곳에 새겨진 ‘열상진원'에서 ‘열상'은 한강의 북쪽, 서울이라는 뜻이며, ‘진원'은 물의 근원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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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은 조선 제 3대 임금인 태종에 의해 1405년에 완공된 조선 왕조의 두 번째 궁궐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모든 궁궐이 소실되었을 때 곧바로 재건되어 19세기에 경복궁이 재건되기 전까지 경복궁을 대신하여 실질적인 법궁 역할을 하였습니다. 창덕궁의 전각들은 자연 형세에 따라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으며, 이 공간 뒤로는 아름다운 후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창덕궁은 비교적 그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고 자연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독특한 공간 구성을 인정 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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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전은 신하들과 나랏일을 논의하기 위한 공식적인 장소입니다. 임금이 주로 머무는 곳이었기 때문에 국왕의 장례식 때 혼전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선정전은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전각 중 유일한 청기와 지붕 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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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당은 주로 국왕의 침전으로 사용되다가 이후 선정전을 대신해 편전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선정전에 비하여 희정당은 좀 더 편안한 업무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17년 화재 이후 1920년 복구하면서 서양식이 가미되었습니다.

순종어차(純宗御車)(20세기초)국립고궁박물관

어차는 임금이 타던 자동차를 말합니다. 순종과 순정효황후가 탔던 어차입니다. 순종황제의 어차는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사가, 순정효황후의 어차는 영국의 다임러Daimler사가 제작하였습니다.

순정황후어차(純貞皇后御車)(20세기초)국립고궁박물관

전체적인 형태가 마차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 초기 자동차 모델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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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광과 환기를 위한 창호는 방을 구분하는 기능도 했습니다. 궁궐의 창호는 설치되는 위치 등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었습니다. 정전에는 화려한 솟을 빗꽃살창호를 사용하여 격을 높였고 그 외 창호에는 비교적 단순한 패턴들이 사용되었습니다.

창덕궁 희정당 벽화(20세기 초)국립고궁박물관

현재의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1920년 재건되었습니다. 접견실에는 화가 김규진이 금강산을 주제로 그린 두 점의 벽화가 있습니다. 서양식 요소인 유리창과 샹들리에, 카펫, 커튼박스 등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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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의 주요 전각 뒤쪽으로, 숲 연못, 정자 등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후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창덕궁의 후원은 ‘북원', ‘금원', ‘상림' 이라고도 불리다가, 1894년 새로 설치한 후원 관리 관청 이름을 따라 ‘비원'이라고도 하였습니다. 후원은 국왕과 그 가족들이 휴식을 취하고 독서를 하며 학문을 연마하는 공간인 동시에 국왕이 아름다운 산수를 감상하고 신하들과 시를 지으며 문예활동을 펼친 공간이기도 합니다. 또, 인재를 뽑는 과거시험을 치르는 한편, 국왕이 농사를 직접 체험하고 왕비가 양잠을 체험하는 공간으로도 이용되었습니다. 후원은 현재까지도 소실이나 변형이 거의 없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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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 초입의 부용지는 정조대 현재 모습으로 조성된 곳으로, 정조는 이곳에서 신하들과 학문을 논하고 낚시를 하거나 활쏘기 모임을 열어 군신간의 회합을 다졌습니다. 또한 과거 시험을 열어 국가의 인재를 선발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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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지 북쪽의 화계 위에는 2층의 주합루가 서 있습니다. 정조는 즉위하자 마자 창덕궁 후원에 어제, 어필을 보관할 2층 건물을 짓게 하고 1층에 숙종의 어필인 규장각 현판을, 2층에는 ‘주합루’라고 쓰인 현판을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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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 시기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1572년 선조가 선비들이 시험을 볼 때 임어했다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건물 앞 마당에서 과거시험, 활쏘기 등 국가 행사가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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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은 1483년 세조 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세 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창건되었습니다. 수강궁은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 상왕 태종을 위해 지은 궁궐이며, 이 터에 자리 잡은 창경궁은 부모의 편안한 노후를 생각하는 효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법궁인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 하여 이 둘을 합쳐 동궐이라고 불렀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후 1616년에 재건되어 국왕과 왕비 뿐 만 아니라 후궁, 공주, 궁인의 처소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창경원'으로 격하되었다가 1983년 본래의 명칭을 되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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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에 들어서면 명정전으로 가기 전에 놓인 돌로 만든 다리 옥천교가 보입니다. 옥천교 난간 아래 홍예 사이에는 도깨비 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나쁜 기운을 쫓기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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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은 대비의 거처를 염두에 두고 마련되어 궁궐의 격식을 모두 충족시키기는 어려웠습니다. 정문과 명정전이 다른 곳과 다르게 모두 동쪽을 향하고 있음이 이를 보여줍니다. 명정전은 현전하는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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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전은 창경궁의 편전으로 국왕이 업무를 보던 곳입니다. 1762년, 사도세자가 아버지인 영조와의 갈등으로 문정전 뜰 앞에 놓인 뒤주에 8일간 갇혀 있다가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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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춘전과 환경전, 통명전과 양화당, 영춘헌과 집복헌 일대는 왕실 가족들의 처소인 내전입니다. 경춘전은 성종이 어머니 인수대비를 위해 지은것이며, 환경전은 국왕이나 왕세자가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이며, 양화당은 내전의 접대 공간이었습니다. 통명전, 집복헌과 영춘헌 뒤 숲이 있는 곳도 궁궐 여성들의 처소가 모여 있던 생활 공간 구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 일대의 모든 내전들이 사라지고, 현재 영조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풍기대, 앙부일구 등이 놓여 있습니다. 이곳에서 춘당대로 넘어가는 숲 속에는 성종의 태를 묻었던 태실과 그 내용을 기록한 태실비도 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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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춘은 ‘햇볕 따뜻한 봄'이라는 뜻으로 경춘전은 주로 왕비나 대비의 거처로 쓰였습니다. 사도세자가 영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할 때 이 곳을 침소로 사용했습니다. 정조가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효명세자빈 역시 이곳에서 헌종을 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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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의 내전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입니다. 월대 위에 건물을 마련하였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박석이 깔린 넓은 뜰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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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전은 국왕이나 왕세자의 침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창경궁 창건 당시 세워졌으나 소실과 재건이 반복되었는데 지금의 건물은 1834년에 재건된 것입니다. 조선시대 의녀 가운데 유일하게 국왕의 주치의 역할을 했던 대장금이 중종의 건강을 돌본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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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춘헌과 집복헌은 후궁들의 처소입니다. 다른 건물들에 비해 규모도 작고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영춘헌과 집복헌은 지금은 연결되어 있지만 200여년전에 그려진 ‘동궐도'에는 따로 분리된 2개의 건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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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은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저택이 있었던 곳이었는데 임진왜란 중 선조가 임시로 머물 거처로 삼으면서 국왕의 공간으로 변화를 맞았다. 1611년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던 이곳에 광해군이 경운궁이라는 정식 궁호를 내려주었고,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이후 궁호가 덕수궁으로 바뀌었습니다. 1919년 고종이 함녕전에서 승하한 이후 북쪽의 선원전과 중명전 일대가 매각되었고, 이후에도 많은 전각들이 철거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덕수궁의 모습은 많이 바뀌었지만 격동적인 한국 근대사의 기억을 담은 채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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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전은 경운궁(덕수궁)의 정전으로 주요 행사가 거행되었던 곳입니다. 고종 황제 즉위 40주년, 51세 생신을 기념하는 행사도 이곳에서 열렸습니다. 중화전은 1902년에 지어졌으며, 동판 글씨로 제작한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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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홍전은 명성황후의 혼전으로 사용되었던 경효전이 위치했던 곳입니다. 고종 황제가 외교관이나 외국의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접견실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외부는 한옥이지만 내부는 샹들리에 등 서양식으로 장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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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홍전 옆에는 고종황제가 생활했던 침전인 함녕전이 있습니다. 1897년 건립되었다가 1904년 대화재 때 소실 된 후 중건되었습니다. 고종은 1919년 68세의 나이로 이곳에서 승하하였고, 고종의 국상 때 빈전과 혼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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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서양식 건물의 건립과 서양 문물 도입을 통해서 왕권 강화와 근대화에 대한 의지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경복궁 건청궁에 조선 최초의 전기시설이 설치되었고 서양식 건물인 관문각이 건립되었으며, 그 옆에는 전통 시계인 자격루 대신 서양 시계탑이 세워졌습니다. 황궁으로 새롭게 재구성했던 경운궁과 그 주위로 각종 서양식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구성헌, 중명전, 정관헌, 돈덕전, 석조전과 같은 서양 건축물들은 환구단과 마찬가지로 황제국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고종의 의도 하에 지어진 건물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 건물들은 자연스럽게 황실의 중요 건물로 사용되면서 대한제국의 격동적인 역사를 그대로 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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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은 외관은 신고전주의 양식이며 실내는 로코코풍으로 장식된 서양식 건물입니다. 영국인 하딩 J.R.Harding이 설계했으며1910년에 지어졌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미술관으로, 광복 이후에는 회담 장소 및 전시관으로 쓰이다가 2014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재탄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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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 앞에는 서양식 정원이 조성되었습니다. 프랑스식 정원으로 만들어 졌다가 덕수궁이 공원화되면서 그 모습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현재와 같은 모습은 일제가 석조전 서쪽에 건물을 더 신축하게 되면서 1938년에 완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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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에 대응하여 서궐이라 불린 경희궁은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의 집이 있던 곳입니다. 이곳에 왕기가 서린다는 소문이 있어 광해군이 그 기운을 누르려는 목적으로 별궁을 짓고 경덕궁이라 이름지었습니다. 이곳은 이후 이궁으로 사용되었는데 많은 임금들이 머물며 정사를 보았고 특히 경종, 정조, 헌종 등은 여기에서 즉위하였습니다. 1760년 영조에 의해 경희궁으로 궁호가 바뀌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교로 사용되면서 궁궐의 자취를 완전히 잃었다가 서울시가 1988년 부터 복원 작업을 시작하였고 2002년에 1차 복원 공사를 마치고 시민들에게 공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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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 정문인 흥화문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숭정전은 새롭게 복원된 것입니다. 원래의 건물은 1926년 일본계 사찰인 조동종 조계사에 매각되었다가 1976년 동국대학교로 이전, 복원되어 정각원이라는 건물로 쓰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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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전 답도도 2개인데 하나는 현재의 자리에 복원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에 놓여져 있는 것입니다.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전시된 불상 위에는 원래 숭정전의 닫집(보개)을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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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인 숭정전 뒤에는 편전인 자정전이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자정전 북서쪽에는 태령전이 있습니다. 태령전의 원래 이름은 태령당이었는데, 1733년 영조 어진 2본을 봉안한 후 1745년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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