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으로의 피란과 피란민의 일상

임시수도 부산에서의 피란민들의 삶을 기록사진을 통해 살펴보세요

LST를 기다리고 있는 주민들임시수도기념관

한국전쟁과 부산의 피란민

부산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약 16만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이 전쟁의 포화가 미치지 않은 부산으로 몰려들게 됩니다. 그 이후 한국정부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회복했던 서울을 다시 떠나게 된 사건인 '1.4후퇴(1951년)'를 전후해 또 한 번 26만명이라는 대규모의 피란민이 부산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남행열차를 기다리는 피란민들임시수도기념관

1951년 3월을 기준으로 부산에 온 피란민들의 출신지는 서울(165,878명), 경기(32,599명), 이북지역(33,891명), 경남, 강원 등의 순이었습니다. 그들은 걷거나 수레와 소달구지를 이용하거나 혹은 배나 화물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추위 속 철로를 따라 걸어가는 피란민들임시수도기념관

전쟁 중 주요 도로는 유엔군에 의해 통제되었기 때문에 피란민들은 대개 보조 도로나 산길로 우회해서 이동하였습니다. 이동 과정 중에 피란민들 대부분이 식량을 제때 공급받지 못해 혹은 매서운 추위로 인해 큰 고초를 겪었습니다. 특히 1‧4후퇴 때는 많은 피란민들 중에 동사자가 속출하기도 하였습니다.

평양 대동강을 건너는 피란민들임시수도기념관

부산에 온 피란민들 중 가장 주목되는 이들은 이북 출신들입니다. 1951년 4월부터 국군‧미군 그리고 공산군이 38도선 근처에서 서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면서 전선(戰線)은 교착 상태에 빠졌는데, 이때 대다수의 피란민들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이북 지역 출신 피란민들은 대부분 부산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후송 대기 중인 물자들이 쌓인 흥남부두의 전경임시수도기념관

이북 지역 피란민들 중 가장 극적으로 부산으로 넘어 온 이들은 함경도 출신들이었습니다.  1950년 10월에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전세가 악화되자 같은 해 12월에 국군과 유엔군은 함경남도의 도청소재지인 함흥(咸興)에서 12km 떨어져 있는 흥남(興南)에서 철수 작전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흥남부두에서 LST에 승선하는 피란민들임시수도기념관

미군이 철수 작전을 결정했을 때 흥남에는 10만 5천 명의 국군과 유엔군이 집결했을 뿐 아니라 수십 만 명의 피란민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흥남 아래에 위치한 원산(元山)이 공산군에 점령되는 바람에 이 피란민들이 남쪽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선박을 이용한 이동밖에 없었습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승선 대기 중인 피란민들임시수도기념관

함경남도 함흥에 모여든 피란민들의 철수 작전에 동원된 배는 미국 상선(商船) 매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 Ship)호였습니다. 이 선박은 2,000명이 최대 정원이었지만 이대 이 선박은 무려 1만 4천여 명의 피란민을 태우고 흥남을 출발했습니다.

거제도의 피란민과 함께 한 이승만대통령 내외임시수도기념관

매러디스 빅토리호 외에도 여러 선박을 타고 흥남을 떠났던 피란민들은 부산 외에도 울산, 마산, 울진, 묵호, 거제 등 여러 지역에 분산 수용되었습니다. 부산 외 타 지역에 도착한 피란민들 중 일부는 휴전 후에 구호양곡(救護糧穀)이 줄어들고 생활기반이 악화되자 부산으로 재이주하였습니다. 특히 거제에서 부산으로 재이주한 함경도 출신 피란민들이 많았습니다.

부산 피란민수용소 모습임시수도기념관

피란민의 증가와 판잣집

정부와 부산시는 부산으로 몰려든 피란민을 수용하기 위해 극장, 공장, 여관, 심지어 일반주택 등을 피란민 수용시설로 활용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수용시설에 들어갈 수 있는 피란민들은 일부에 그쳤습니다. 수용시설에 들어갈 수 없고 셋방을 구할 수도 없는 피란민들은 주인이 없는 공터나 산비탈 그리고 해안가 등지에 땅을 대강 다듬은 뒤 도심 주변에서 구한 볼박스나 판자, 거적때기 등을 이용해 임시주거지를 만들어 살았는데, 이러한 집들은 판잣집으로 불렸습니다. 

음식을 배급받기 위해 줄 지어선 적기 우암동 피란민촌 어린이 모습임시수도기념관

수용시설에 들어갈 수 없고 셋방을 구할 수도 없는 피란민들은 스스로 살 집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없는 공터나 산비탈 그리고 해안가 등지에 땅을 대강 다듬은 뒤 도심 주변에서 구한 볼박스나 판자, 거적때기 등을 이용해 임시 주거지를 만들어 살기 시작했습니다.

부산의 피란민수용소 모습임시수도기념관

정부와 부산시는 부산으로 모여든 피란민을 수용하기 위해 극장‧공장, 여관, 심지어 일반주택 등을 피란민 수용시설로 활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수용시설에 들어갈 수 있는 피란민들은 일부에 그쳤습니다. 일부 돈을 마련할 수 있는 피란민들은 집을 구해 살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부산으로 몰려든 데다 집세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바람에 대부분의 피란민들은 셋방조차 구할 수 없었습니다.

피란민촌 아이들임시수도기념관

볼박스나 판자, 거적때기 등을 이용해 만든 집은 판잣집으로 불렸습니다. 도심, 부두, 국제시장과 같은 대형 시장과 가까운 지역, 이를테면 용두산과 복병산, 영주동, 초량동, 수정동 그리고 보수천 및 영도 바닷가 주변은 우후죽순 건립된 피란민들의 판잣집들로 빼곡히 채워졌습니다.

부전천변 피란민 판자촌 전경임시수도기념관

판잣집들은 대개 엉성하게 지어졌는데 사람들이 이곳에서 추위와 더위를 견뎌야 했습니다. 그리고 판잣집들이 갑자기 들어선 산동네나 해변, 하천에서는 항상 교통, 위생, 상수도 문제 등의 문제가 발생해 피란민들을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국제시장 전경임시수도기념관

판잣집은 생활의 불편만 끼친 것은 아니었습니다.1950년대 부산에는 국제시장, 부산역대화재, 용두산 화재 등 크고 작은 화재가 끊이지 않았는데, 불소시개 역할을 한 판잣집이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부산 피란 학교에서 수업 중인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생들임시수도기념관

피란 학교

전쟁 중 불안정하고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피란민들은 자녀를 학교에 보내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학생들도 열심히 학업을 이어나갔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국 대부분의 대학이 휴교했습니다.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교착 상태에 빠지자 정부는 1951년 2월에 ‘전시하 교육 특별 조치 요강’을 발표하고 부산, 광주, 전주, 대전 등 4개 도시에 ‘전시연합대학(戰時聯合大學)’을 설치하여 교수 부족과 이에 따른 부실 수업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후에도 전쟁이 지속되자 1951년 9월 이후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건국대 등의 서울의 여러 명문 대학들이 부산에 피란학교를 설치해 운영했습니다. 

피란학교의 학생들임시수도기념관

그 이후 타 지역의 중학교와 초등학교도 부산에 피란학교를 세워 학사과정을 운영했습니다. 부산의 피란 초등학교 수는 1951년 12월을 기준으로 24개 학교에 달했습니다. 이들 학교 중 일부는 피란국민학교로 따로 간판을 붙이고 수업했지만, 대부분은 기존 부산의 초등학교에 서울 피란 아동만을 수용해 학급을 따로 편성해 운영했습니다.1951년 2월 정부 조치에 따라 타 지역의 중학교와 초등학교도 부산에 피란학교를 세워 학사과정을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중 부산에 등록된 피란 초등학교 수는 1951년 12월을 기준으로 하여 24개였으며, 그 학생 수는 2만 1,630명이었습니다. 

야외에서 수업을 받는 학생들임시수도기념관

전쟁 중 부산지역 학교 건물은 대부분 군대나 병원으로 징발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상당수의 피란학교가 산간이나 노천에서 천막을 치거나 가건물을 짓는 방식을 통해 공간을 마련하고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학교마다 책걸상과 교과서는 늘 부족했으며 다수의 교사가 징병되는 바람에 교사 수는 늘 적었습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도 피란민들은 자신들의 자녀를 학교에 보내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학생들은 이러한 열악한 교육 환경에서도 학업을 이어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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