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영화의 역사 1

한국 독립영화의 태동

1. What is Korean Independent Film?

한국영화에서 독립영화란 어떤 의미일까. 작은영화, 소형영화, 민중영화, 독립영화 등 시대별로 각각 다양하게 불려왔던 한국 독립영화는 미국 독립영화나 일본 자주영화 등과는 다른 보다 포괄적인 개념을 담아 왔다. 1980년대, 암울했던 시대와 이른바 ‘충무로’로 대표되던 주류 한국영화계에 대한 반발에서 본격화되면서 한국독립영화는 정치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이 강한 정체성을 형성해 왔다. 
하지만 동시에 상업영화의 반대급부로서 새롭고 다양한 미학적 시도를 통해 ‘다른 영화’의 가능성을 확인시켰으며 상업영화로는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한 영역을 형성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독립영화는 관객 개개인에게도 단순한 수용자로가 아닌 스스로 카메라를 들고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창작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2. 한국독립영화 전사: 1980년대 이전의 영화 소모임

1970년대 이전 한국독립영화의 단초는 대학 연극영화과나 영화동아리의 실습작품이나 졸업영화제, 아마추어 영상그룹의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연극영화과 동아리의 공식 활동은 중앙대학교 예술대의 전신인 서라벌예술학교 연극영화과 동아리인 ‘영상회’(1971)가 처음이다. 이춘연, 김유진, 김수남, 정소녀 등이 현재도 제작자, 감독, 배우, 학자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이들이 당시 이곳에서 활동했다. 또한 1970년 7월 창립해 8mm 영화를 만들었던 한국소형영화동우회나 16mm 영화를 제작했던 영상연구회(1972), 카이두 실험영화그룹 등이 1970년대 초 활동했던 영화그룹들이다.



<해풍>(1950)
1970년대 이전 제작된 학생 단편이다. 당시 동국대학교 국문과 학생이던 유현목 감독이 만든 단편으로, 미국공보관에서 시사회를 가졌던 기록이 남아있다.

시네클럽과 동서영화동우회
영화 감상그룹의 성격을 지닌 영화동호회: 연세대의 영상미학반(1974), 프랑스문화원의 시네클럽(1978), 독일문화원의 동서영화동호회(1978) 등. 동서영화동우회는 3회에 걸쳐 ‘동서영화회보’를 발간하기도 했다.

청년영상연구회(1979)와 <강의 남쪽>(1980)
청년영상연구회는 하길종 감독이 주축이 된 ‘영상시대’에서 선발한 6명의 연출부들이 연출공부의 일환으로 16mm 단편영화 작업을 하며 시작됐다. 장길수, 신승수, 이세민, 정유성 등이 참여했다.

강의 남쪽 (big),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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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수 감독,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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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남쪽> 장길수

<강의 남쪽> (장길수, 1980)
청년영상연구회에서 제작한 첫 번째 16mm 작품. 러닝타임 14분의 단편으로 현 은마 아파트 단지의 강남 아파트 공사장을 배경으로 그 현장에서 날품팔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단한 일상을 그리고 있다. 1980년 연세대에서 첫 공개.

3. 문화운동으로서의 영화에 대한 자각

얄라셩(1979)
서울대학교 영화연구회. 집단창작체제로 운영되는 독립영화 활동을 본격적으로 모색한 첫 번째 단체. 영화에 관심 있는 졸업생의 모집공고로 79년 첫 결성,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운동적 성격 띄게 되면서 문화운동으로서의 단편영화운동을 시작했다.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박광수, 김홍준, 홍기선, 문원립, 송능한, 임병용 등이 이 곳 출신이다. 

박광수 감독,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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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선,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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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수 홍기선

서울영화집단(1982~1986)
얄라셩 졸업생 출신이 결성. 새로운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출발, 개인제작과 공동제작 병행하며 다수의 단편영화를 제작했다. 첫 작품인 <판놀이 아리랑> 제작. <전야제> <출가> <결투> <장님의 거리> <생활> 등 제작했으며 현실참여에 주목한 연구작업의 성과로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를 출판하기도 했다. 
‘서울영화집단’은 외국, 특히 남미의 영화운동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는 일걱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문화운동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 는 출발점이 됐으며 치열한 영화학습을 통해 이후 최근의 영화 열기나 영화광이 양산될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박광수, 문원립, 홍기석, 김의석 김홍준, 전양준 등이 참여했으며 대표작으로 <결투> <그 여름> 등이 있다.

판놀이 아리랑,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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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big,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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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놀이 아리랑> <그 여름>  

작은영화제(1984): “작은 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1984년 7월 7일~8일, 이틀에 걸쳐 국립극장 실험무대. 영화아카데미, 영화마당 ‘우리’, 동서영화연구회, 서울영화집단 등이 공동으로 한 최초의 영화제로 <강의 남쪽>(장길수) <문>(서명수) <승의 눈물>(최사규) <판놀이 아리랑>(서울영화집단) <전야제>(황규덕) <천막도시>(김의석) 등 6편이 상영됐다. 프랑스문화원 주최 ‘토요단편’이 시작이 됐으며 당시 영화운동에서 주요 쟁점이었던 영화법에 대한 문제제기를 여론화하려는 일환이었다. 
‘작은영화제’는 다양한 주제의 다양한 작품을 인정하는 영화제로 의사를 수렴하고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의 작품들 소형, 단편영화와 변별성을 둔 ‘작은영화’의 개념을 제시했다. 그들은 넓은 의미에서는 현실을 비판적 시각으로 재해석, 미래지향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열린 영화, 좁은 의미로는 협의로는 35mm와 규격상으로 대비되는 16mm, 8mm 영화, 현실과 유리된 단편영화를 지향하고자 했다.

1984년의 작은 영화제는 1985년 1월 처음 시작한 영화마당 ‘우리’ 주최 8mm 워크샵으로 이어져 대학 내의 영화운동을 대항문화로 규정, 대학 내 영화동아리 설립을 활성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서울대 얄라셩(1979), 고려대 돌빛(1983) 등 기존의 영화동아리를 포함, 경희대 그림자놀이(1985), 서강대 영화공동체(1985), 연세대 영화패(1985), 한양대 소나기 등 10여개의 대학 영화패가 만들어졌다

서울영상집단과 <파랑새> 사건
1986년 10월 18일, 신촌 우리마당에서 ‘서울영화집단’을 비롯한 소규모 영화 집단들을 발전적으로 해체, 통합하여 ‘서울영상집단’이 설립되었는데, 필름매체만 국한하여 사고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였다. 1986년, 외국농축산물 수입으로 인해 파탄에 이른 농촌의 현실을 그대로 담은 를 지역농민과 함께 제작하였는데, 사전 심의없이 영화를 상영했다는 이유로 홍기선, 이효인 등 서영집의 대표들이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파랑새 사건‘으로 불렸던 이 사건 이후 1987년 서영집은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민중영상운동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라는 내용의 주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서울영상집단,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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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 
1986년 서울영화집단이 농활 중 카톨릭 농민회의 지원을 받아 제작한 40분 가량의 8mm 영상. 영상 중 일부 장면은 지역 농민이 직접 찍기도 헸는데, 이후 순회상영을 통해 농민의 문제를 농민 스스로 인식하고 수용케 했다는 점, 즉 현장 속에서 제작, 상영됐다는 점과 영화매체를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 인식하고 구체적인 실천을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서울영상집단,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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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영화연합과 ‘인재를 위하여’
85년 다수 결성된 대학 영화동아리들은 이후 각 동아리 별로 개별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과 <파랑새> 사건 공판 참여를 계기로 13개 대학의 대학영화패들이 모여 87년 5월 24일 대학영화연합 결성하게 된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과 88년 8.15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장윤현 감독의 <인재를 위하여> 장동홍 감독의 <그날이 오면> 등 진보적, 철학적 사고를 담은 단편영화들이 다수 제작되었다. 
<강아지 죽는다> <그날이 오면> <버려진 우산> <노란깃발> <공장의 불빛> <인재를 위하여> <울타리를 넘어서> 등 15편의 작품들은 87년 12월 연우소극장에서 영화마당 우리와 대영연, 전국영화과연합이 공동 주최한 ‘열린 영화를 위하 여’ 영화제를 통해 소개되었으며 각 대학에 순회 상영되었다.

장윤현,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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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현

<인재를 위하여>(장윤현, 1987)
8mm로 제작된 45분의 중편으로 한양대 소나기의 5번째 워크샵 작품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6월 항쟁의 영향으로 고문과 관련된 단편을 제작한 것으로 당시 각 대학에서 4~5만명이 관람했을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작품이었다. 이후 88년 비디오로 보급되기도 했다.

인재를 위하여,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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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를 위하여>  

제 38회 베를린영화제 포럼
1988년 제38회 베를린영화제 포럼을 통해 한국 독립영화들이 처음으로 국제무대에 소개되었다. <공장의 불빛> <그날이 오면> <칸트씨의 발표회> 등 7편의 단편들이 상영되어 주목받았다.

(1987),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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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씨의 발표회> 

4. 장편독립영화의 등장과 독립다큐멘터리

(1990),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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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전야>  

장산곶매와 <파업전야>
1980년대 후반 한국독립영화계에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1987년 성균관대에서 열린 정기발표회 당시 장윤현, 장동홍 등의 영화인들이 모여 16mm 장편 제작을 모색하면서 1988년 겨울, 최초의 장편 독립영화 <오, 꿈의 나라>를 제작, 1989년 1월 극장 한마당에서 상영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홍기선 감독을 중심으로 한 ‘장산곶매’를 결성, 상업영화의 반대 지점에서 장편을 만들자고 했으며 당시 금기시되던 광주를 소재로 한 <오, 꿈의 나라>로 인해 홍기선 감독과 극장 한마당의 유인택 대표가 재판에 회부된다.

이후 장산곶매는 전문적인 극영화제 제작에 대한 의지를 강화하면서 1990년 <파업전야>를 제작하게 된다. 한국 독립영화사의 한 획을 그은 작품이자 비공식 2백만이 봤다고 알려진 <파업전야>는 그동안의 한국독립영화의 집대성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1990),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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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곶매

한국영화아카데미와 단편
장편 독립영화의 등장은 상대적으로 단편 제작을 위축시키는 측면이 있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1994년 서울단편영화제 시작 전까지 계속됐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영화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한 완성도 있는 단편들이 다수 발표되었다. 변혁, 이재용 감독의 <호모 비디오쿠스>(1990), 허진호 감독의 <고철을 위하여>(1992), 봉준호 감독의 <지리멸렬>(1994), 장준환 감독의 <2001 이매진>(1994) 같은 현재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감독들의 재능과 개성으로 충만한 단편들이 다수 선보인 것도 이 때였다. 김성수 감독의 감각적인 스타일이 돋보이는 <비명도시>(1993)나 김대현 감독의 <지하생활자>(1993) 등도 당시 화제를 모은 단편들이다.

호모비디오쿠스,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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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비디오쿠스> 

지리멸렬,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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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멸렬> 

고철을 위하여,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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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철을 위하여> 

2001이매진,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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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이매진>

<상계동 올림픽>과 독립다큐멘터리
1980년대 5월, 누군가에 의해 배포되기 시작한 광주민주항쟁의 실상을 담은 비디오 영상은 보는 이들에게 충격과 은폐된 현실을 폭로하고 확산시키는 영상매체의 힘을 강력하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가 가져온 환상 이면에서 죽어나가는 철거민들의 실상을 생생하게 폭로한 <상계동 올림픽>(1988)은 영상매체의 힘을 다시한번 확인시켜 준 작품이었으며 이러한 문제의식과 성과는 다큐멘터리 영상집단 ‘푸른영상’으로 이어졌다.
1980년대 암울한 시대에 맞선 저항의식과 사회의식, 주류 영화에 대한 반작용에서 출발한 한국 독립다큐멘터리는 1990년대 이후 정치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이 강한 독립영화의 정체성 형성과 성장에 중요한 기반이 되어왔다. 특히 필름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작과 휴대가 용이한 비디오 매체는 노동, 빈민, 여성 등 다양한 투쟁의 현장과 사회문제에 대한 신속한 개입과 관심을 이끌어내는 동력이 되었다. 속보형식을 취해 현장성과 기동력을 한껏 살려낸 노동자뉴스제작단의 일련의 작품들이나 <깡순이 슈어 프러덕츠 노동자> 같은 초기 작품들이 보여준 현장성과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후 한국 독립영화와 독립 다큐멘터리의 성격을 규정짓는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1988),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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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계동 올림픽>(1988)

<상계동 올림픽>(1988, 김동원)
전 국민이 올림픽의 성공을 기원하는 이면에서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고 고통 받는 철거민들의 실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감독이 3년간 함께 생활하면서 담은 생생한 기록을 담은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한국 다큐멘터리로는 처음으로 야마가타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초청 상영되었다.

낮은 목소리 2,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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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목소리 2> 

변영주,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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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주

<낮은 목소리> 3부작
변영주 감독과 ‘기록영화사 보임’이 1995년부터 1999년까지 제작한 세 편의 연작. 90년대 문민정부와 지방 자치, 신 사회운동의 등장에 따른 국가권력과 시민의 긴장관계가 상대적으로 이완됨에 따라 선전물의 기능을 넘어선 다큐멘터리 자체의 미학과 정체성 탐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작품. 
일본군 성노예의 경험을 지닌 할머니들의 일상을 관찰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그들을 역사의 희생자로서가 아닌 스스로를 재구축하는 성적 주체성을 부각시켰으며 개인의 문제를 사회적, 역사적인 문제로 확장시킨 작품이다. 또한 ‘기록영화사 보임’이라는 독립 제작사를 통해 기획에서 제작, 배급까지 전 과정을 아우르는 독자적인 제작시스템을 처음으로 시도했으며 극장에서 개봉된 최초의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로서 이후 독립영화 제작, 배급에 있어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 

5. 1990년대 중반 이후

서울단편영화제(1994~1998)
1994년 11월 5일~11일, 삼성 나이세스 주관으로 제 1회 ‘서울단편영화제’가 개최되었다. 이로 인해 단편영화에 대한 인식 확산과 제작 활성화를 가져왔으며 1994년부터 4회 진행되는 동안 문승욱, 임순례 등의 해외 유학파들이 대거 등장하여 <우중산책>(임순례, 1994), <모범시민>(김본, 1994) <낙타뒤에서>(이상인, 1996), <생강>(정지우, 1996) <기념촬영>(정윤철, 1997) 같은 완성도 높은 단편영화들이 다수 소개되었다. 하지만 ‘서울단편영화제’는 “신진 감독들을 발굴, 육성하여 본격적인 상업영화로 뛰어들기 전 습작기를 주는 완충시스템으로 작용하기를 기대한다”는 영화제 측의 취지대로 단편영화를 상업영화 제작을 위해 거쳐 가는 단계 정도로 생각하는 한계를 노출시키기도 했다.

우중산책,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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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산책> 

기념촬영,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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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촬영> 

생강,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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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낙타뒤에서,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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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뒤에서>  

독립영화제와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에 대한 독립영화계의 자발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1995년 ‘서울독립영화제’, 1996년 ‘인디포럼’과 ‘서울다큐멘터리영상제’ 같은 영화제들이 시작되었고 ‘아래로부터의 영화제’, ‘비디오’라는 매체의 특성을 십분 활용하여 기존의 독립영화와는 또 다른 재기와 자유스러움이 넘치고 누구나 제작할 수 있다는 대중성을 표방한 ‘10만원 비디오 영화제’ 같은 다양한 상영이 시도되었다. 
또한 1996년 ‘푸른영상’의 김동원 대표가 구속되면서 독립영화계 내부에서의 결속의 필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의 결속에 대한 1998년에는 독립영화계 전 영역의 의지와 인력을 하나로 모은 ‘한국독립영화협회’가 결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최소원,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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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원 비디오 영화제의 최소원

김동원,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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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원

제공: 스토리

Curator—Mo Eunyoung, Korean Film Archive

참여: 모든 표현 수단
일부 스토리는 독립적인 제3자가 작성한 것으로 아래의 콘텐츠 제공 기관의 견해를 대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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