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역에서 전선으로 출발하는 학도의용군 환송식(1950)원본 출처: 청암아카이브
학도의용군
6·25전쟁 당시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펜 대신 총을 들고 싸운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학도의용군'이라고 부릅니다. 학도의용군은 말 그대로 학생의 신분으로서 자원한 군인들이었습니다. 원래 1949년에 제정된 병역법에 따르면 평시 병역은 20세부터, 그리고 전시에 동원될 수 있는 제2국민역은 17세부터로 지정하였으나, 상당수의 학생들은 전쟁이 발발한 직후의 위기를 맞아 자체적으로 조직을 이루거나 개별적으로 입대하였습니다.
서울 성동공업중학교에서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하라고 방송하는 어린 학생원본 출처: 청암아카이브
1950년 6월 29일 수원에 모인 200여 명의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국방부 정훈국의 후원으로 '비상학도대'가 조직되는데, 이것이 '학도의용군'의 시초입니다. 이후 참전한 학생들은 전투요원 5만여 명, 후방지원요원 20만 명 등 총 30만여 명에 달했으며, 많은 학도의용군들이 전장에서 싸우다 군번도 계급도 없이 전사하였습니다.
포항여중 전투
'포항여중 전투'는 6·25전쟁에서 학도의용군의 희생과 헌신을 잘 보여줍니다. 1950년 8월 11일, 낙동강 전선 중 포항을 사수하던 국군 제3사단이 북한군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학도병 71명이 독립중대를 구성하여 포항여중에서 북한군을 대적하였습니다. 1개 독립중대로 북한군을 대적한다는 것이 무모한 판단일 수도 있었지만 기적과도 같이 국군 제3사단이 포항여중에 있던 후방지휘소를 남쪽으로 옮기는 동안 11시간가량 적의 진격을 지연시킴으로써 제3사단과 포항 시민들이 후방으로 안전하게 철수하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하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71명의 학도병은 백병전까지 감행하며 끝까지 저항하였고, 47명의 학도병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후 포항여중 전투는 '포화 속으로' 라는 영화의 소재로 다루어 지기도 했습니다.
기증사진에 담긴 학도병들의 모습
재일학도의용군이 서명한 태극기전쟁기념관
재일 학도의용군
전쟁이 발발하자 위험에 빠진 조국을 구하기 위해 재일동포 학생들도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는데, 우리는 이들을 '재일 학도의용군'이라고 부릅니다.
재일학도의용군 모자와 휘장전쟁기념관
전쟁 중 이들은 유엔군 통역, 군수기지 경비, 치안유지 등 전 후방 각지에서 활약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휴전협정 체결 후 일본정부에 의해 입국을 거부당했습니다. 당국의 출국 허가 없이 나갔다는 이유였습니다. 결국, 젊은 나이에 유학길에 올랐던 학생들은 전쟁이 끝난 후 우리나라에서 다시 자신만의 삶을 개척해 나가야 했습니다.
6·25전쟁에 의용군으로 참전했던 재일학도병 증명서
학도의용군 행진 사진(이태영 기증)전쟁기념관
전쟁에 참가한 수많은 학도의용군은 제대로 된 제식훈련을 받지도 못한 채 전장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한 겨울에는 모자란 보급품으로 버텨야 했으며, 소총이나 기관총의 사용법을 몰라서 전투 중에 사용법을 익히다가 전사한 학생들도 많았습니다.
존슨 대통령이 국립서울현충원 내 학도의용군의 묘에 참배하고 있다(1966)원본 출처: NARA /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전쟁의 아픔과 고통을 견디기에는 너무 어린 학생들이었지만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 하면서도 자신들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것입니다.
기획: 정서희, 신유진
편집·진행: 정서희
참고자료: 『전쟁기념관 해설을 담다』(전쟁기념관,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