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사랑하는 시인, 김소월

한국의 시인 김소월의 삶과 그의 아름다운 시들을 살펴보세요

김소월 오산학교 시절배재학당역사박물관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김소월

김소월(1902~1934)은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 받아 온 한국의 대표 시인입니다. 그의 본명은 김정식이며, 소월은 그가 작품을 발표할 때 사용하였던 그의 호로, 일반적으로 김소월로 그를 부르고 있습니다. 김소월은 33해 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한국인의 정서를 가장 한국적인 목소리로 노래했으며, 일제 강점기라는 어두운 시기 한국인의 비애와 지식인의 고민을 담은 민족시인으로 150여편의 시를 남겨 오늘날에도 크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계희영배재학당역사박물관

김소월은 광산업에 종사하며 재산을 모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그가 세 살 때 아버지가 일본인들에게 폭행을 당해 정신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김소월은 할아버지 김상도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고 숙부 김응열과 결혼한 계희영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어린 소월은 숙모 계희영에게 한국 전래 동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이는 소월이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김소월 오산학교 시절배재학당역사박물관

김소월은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4살이 되던 1915년에 독립운동가 이승훈이 나라를 구하기 위한 민족 의식 고취를 목표로 세운 오산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소월은 그의 인생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 조만식과 김억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진은 현재 남아있는 김소월의 유일한 사진으로, 오산학교 재학시절, 김소월이 17살 때의 모습으로 추정됩니다.

조만식배재학당역사박물관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 한국민족의 경제자립운동인 물산장려운동을 조직한 독립운동가이자 실천가였고, 당시 교장이었던 조만식(1883~1950)을 만났습니다. 조만식은 김소월의 작품 시각이 민족과 국가로 발전, 성장하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김소월은 조만식의 영문명 JMS 라는 시를 쓰기도 하였는데, 이 시에 조만식에 대한 김소월의 생각이 그대로 남겨있습니다.

오산 계시던 제이.엠.에스
십년 봄만에 오늘 아침 생각난다
...
민족을 위하여는 더도 모르시는 열정의 그 임
...
'제이엠에스' (부분) - 김소월

김억배재학당역사박물관

또한 김소월은 오산학교를 다니면서 김안서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김억(1896년~미상)을 스승으로 만나게 됩니다. 김억은 김소월이 오산학교를 다니던 시절 교사로 재직하면서 소월의 재능을 알아보고 김소월을 응원하고, 문단에 소개하는 등 소월이 시인으로 활동할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김소월은 김억의 응원으로 1920년, 그의 나이 18세에 '창조' 5호에 시를 실으며 등단하게 됩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의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전경배재학당역사박물관

배재학당에서의 김소월: 짧았던 서울 생활, 진했던 작품 활동

김소월은 배재학당 시절인 1922년부터 1923년 시인으로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였습니다. 배재학당은 김소월이 다니던 오산학교가 1919년 3·1운동의 발발으로 일본군에 의해 폐교 당하자 학업을 잠시 중단했다가 편입한 곳으로 한국 최초 서양식 근대 교육 기관입니다. 김소월은 1922년 배재학당에 5학년에 편입하고 그 이듬해 3월에 졸업하였습니다. 당시 배재학당은 당시 조선 정부와 교육 협정을 맺은 교육기관으로 근대 인제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교과목 이외에 특별활동시간에는 연설, 토론 등을 장려하던 곳이었습니다. 이러한 교육을 받은 배재 학생들은 협성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독립협회로 발전하여 민족 운동 중심지, 민족 계몽운동의 뿌리가 되기도 한 곳이었습니다.

서울, 배재학당. 설립자이자 학장인 H.G. 아펜젤러(1885/1900)배재학당역사박물관

김소월은 배재학당에 편입한 해인 1922년, 가장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개벽' 1922년 1월호에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를 발표하였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시 '진달래꽃'도 배재학당 재학 시절 '개벽' 1922년 7월호에 발표한 시입니다. 김소월은 1922년 한해에만 50여 편의 시를 발표했고, 이 시기 소설가인 나도향(배재학당 1918년 졸업생)과도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배재학당에서의 김소월배재학당역사박물관

김소월은 배재학당 재학 시절동안 배재학생청년회 문학부 활동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학교생활을 하였습니다. 1903년 조직된 배재학생청년회는 '종교부, 사교부, 문학부, 운동부, 음악부, 의사(議事)부' 총 6개 부서로 조직되어 있었는데, 이 중 문학부는 교지 편집을 담당하였습니다.

헨리 다지 아펜젤러의 배재 교지 제2호(1923년)배재학당역사박물관

문학부 소속으로 김소월은 교내 잡지인 '배재' 2호에 여러 편의 시와 글을 발표하였습니다. '배재'는 배재고등보통학교의 교지로 학생회 배재학생청년회에서 학생들의 문학 작품, 논설, 학교 소식 및 현황 보고 등을 담은 잡지입니다. 당시 학생들의 현실 인식과 사회적 소명의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배재' 제 2호에는 소월이 번역한 단편소설 '떠도라가는 계집'을 비롯하여 '달밤', '깊고 깊은 언약', '오시는 눈', '접동', '길손', '봄바람', '비단안개' 등 소월의 시 7편이 실려 있습니다. 이 시기 김소월은 서구의 문학작품을 번역하는 작업과 함께, 자연을 소재로 하는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김소월의 오시는 눈, 접동(1923년)배재학당역사박물관

'오시는 눈', '접동'
- 배재 2호

오시는 눈

땅 위에 새하얗게 오시는 눈,
기다리는 날에는 오시는 눈,
오늘도 저 안 온 날 오시는 눈,
저녁불 켤 때마다 오시는 눈.

- 배재 2호

접동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 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새움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글쎄요 죽어 접동이 되었어요

아홉이나 되던 오랍동생도
죽었으니 잊었으랴, 못잊어서
해 지기를 기다려, 밤을 기다려
아우래비 접동을 부르며 웁니다.

- 배재 2호

김소월의 비단안개(1923년)배재학당역사박물관

비단안개

눈들이 비단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차마 잊지 못할 때러라
만나서 울던 때도 그런날이오.
그리워 미친 날도 그런 때러라.

눈들이 비단안개에 둘리울 때,
그 때는 홀목숨은 못살 때러라.
눈 풀리는 가지에 당치맛귀로
젊은 계집 목매고 달릴 때러라.

눈들이 비단안개에 둘리울 때,
그 때는 종달새 솟을 때러라,
들에랴, 바다에랴, 하늘에서랴,
아지 못할 무엇에 취할 때러라.

눈들이 비단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차마 잊지 못할 때러라.
첫사랑 있던 때도 그런 날이오.
영 이별 있던 날도 그런 때러라.

- 배재 2호

김소월의 김소월의 편집후기(1923년)배재학당역사박물관

여려 편의 시 이외에도 '배재' 2호 에는 김소월이 직접 쓴 편집 후기가 담겨있습니다.

'얄미운 입학시험에 걸리어 편집을 다 마치지 못하고 고향으로 가게 됨에는 편집제형에게 사죄 사죄(소월)'

김소월은 일본 대학 입학시험을 위해 일찍 고향으로 돌아가야하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김소월은 1923년 봄 일본 도쿄상과대학에 입학하여 유학생활을 시작하였으나,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으로 유학생활을 마쳤다고 합니다.

김소월 학적부(1)(1923년)배재학당역사박물관

김소월의 배재학당 시절 학교 생활은 학적부(1923)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성명 김정식, 원적 평안도 정주군 곽산면

입학 대정 11년(1922) 4월 1일 5학년 보입시험(편입), 졸업 대정 12년(1923) 3월 1일

김소월 학적부(2)(1923년)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 5학년, 국어강독 100점, 한문강독 98점

석차 4, 수험인원 44, 교수일수 220, 출석일수 212, 결석일수(유고: 특별한 사정이나 사고로 인하여 결석함) 8

제 7회 배재학당 졸업생들배재학당역사박물관

김소월은 1923년 3월, 44명의 졸업생 중 4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배재학당을 졸업하였습니다.

진달래꽃 시집 초판본(1925년)배재학당역사박물관

김소월의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과 대표작들

김소월은 그의 유일한 시집 '진달래 꽃'(1925. 12. 26. 매문사 초판 발행, 등록문화재 제 470-2호)은 김소월이 24세 되던 1925년 출판하였습니다. 진달래 꽃에는 김소월을 대표하는 시를 포함해, 126 여편의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 '진달래 꽃'에는 한국인의 감정을 자연과 한국적인 것으로 표현하여 한국인들이 깊게 공감할 수 있는 김소월의 시들이 실려있습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1922년)배재학당역사박물관

'진달래꽃' 은 동양적인 체념의 운명관을 바탕으로 아름다보 처절한 사랑의 자기 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인고의 정신을 노래한 시로 여겨집니다.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 개벽 25호(1922년 7월)

김소월의 초혼(1925년)배재학당역사박물관

'초혼'은 장례 절차의 일부인 고복 의식 중 초혼(招魂)을 소재로 하여 사랑하는 이를 잃은 비탄과 절망감을 격정적인 어조로 기리고 있습니다.

초혼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고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성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진달래꽃(1925년12월)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1922년)배재학당역사박물관

'엄마야 누나야' 는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 엄마와 누나와 함께 단란하게 살고 싶은 동경의 심정을 소박한 동시적인 정감의 운율로 노래하고 있는 시 입니다.

엄마야 누나야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 개벽 19호(1922년 1월)

김소월의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1925년)배재학당역사박물관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은 김소월의 다른 서정시와는 다르게 그의 현실인식이 드러난 시입니다. 국권을 상실한 한국 민족의 현실에서 그 상황을 벗어나고자하는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라면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즈란히
벌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夕陽)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섭대일 땅이 있었드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손에
새라 새롭은 탄식(歎息)을 얻으면서.
동(東)이랴, 남북(南北)이랴,
내 몸은 떠가나니, 볼지어다,
희망(希望)의 반짝임은, 별빛이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心情)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늘은 길이 이어가라. 나는 나아가리라
한 걸음, 또 한 걸음. 보이는 산(山)비탈엔
온 새벽 동무들 저저 혼자…… 산경(山耕)을 김매이는.

- 진달래꽃(1925년 12월)

김소월의 산유화(1925년)배재학당역사박물관

'산유화'는 산의 꽃과 새를 통해 생에 내재된 근원적 고독과 비애, 만물의 생명과 죽음의 본원적 순환성을 환기하는 시 입니다.

산유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볼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 진달래꽃(1925년 12월)

김소월의 접동새(1923년)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접동새'는 어릴 적 숙모에게 이야기를 듣고 탄생한 작품입니다. 김소월이 일곱 살 때 숙모 계희영은 접동새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 김소월은 '아오라비 접동' 하면서 수없이 외었다고 전해집니다.

접동새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옵이나 남아 되는 오랍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 배재 2호(1923년 3월)

소월시집 진달래꽃(1951년)배재학당역사박물관

김소월 그 이후

김소월의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꾸준하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한국 가곡의 20%가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것으로, 시를 토대로 만들어진 가곡 중 가장 많은 수의 곡이 김소월의 작품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대중 가요로도 리메이크 되어 노래되고 있고, 최근에는 김소월의 이야기가 '봄밤' 이라는 뮤지컬로 재탄생되어 인기를 끌기도 하였습니다.

성문사의 소월시집 못잊어(1963년)배재학당역사박물관

김소월의 단 한권의 시집 '진달래꽃'은 지금까지 600여 권 이상의 판본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추정 판매집계 600만부로, 그의 시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성문각의 김소월 영한대역 시선집(1959년)배재학당역사박물관

김소월의 문학성은 한국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각지에서 인정받았습니다. 그의 시는 미국, 러시아, 프랑스, 중국, 일본 등 13개 국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신세기레코오드의 유주용 부모 앨범(1969년)배재학당역사박물관

김소월의 시는 노래와 영화로도 리메이크 되었습니다.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먼 후일', '산유화', '초혼', '못잊어' 등 다수의 작품이 대중가요로 널리 불리워졌습니다. 특히, 김소월 시 '부모'는 서영은 작곡 유주용 노래로 재탄생 되어 1969년 발표되었습니다. 이후 양희은, 김세환, 이미자, 은방울자매, 나훈아, 문주란 등 많은 아티스트들의 리메이크를 통해 꾸준히 불려지고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매년 5월 어버이날이면 '부모'를 떠오르게 만드는 김소월의 노랫말은 한국인들의 마음을 적시고 있습니다.

아세아레코오드사의 정미조 개여울 앨범(1972년)배재학당역사박물관

1922년에 발표한 김소월의 시 '개여울'은 1967년 김정희 노래 이희목 작곡으로 최초 발표되었습니다. 이후 정미조 노래로 1972년 리메이크가 되어 다시 주목 받게 되었습니다. 현재까지도 적우, 심수봉, 왁스, 아이유 등 많은 아티스트들이 리메이크 작업을 통해 한국에서 사랑받는 곡으로 꾸준히 다시 노래되고 있습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포스터(1968년)배재학당역사박물관

김소월의 시 '산유화',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이여', '왕십리' 등은 영화로도 만들어 졌습니다. 그 중 당시 최고의 인기배우 신성일, 윤정희가 열연한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1968년 12월 18일 개봉)는 소월의 시에서 제목을 가져왔으며, 서로 사랑하지만 헤어진 주인공들이 재회했지만 비극적으로 헤어지는 결말을 담았습니다.

진달래꽃 시집 초판본(1925년)배재학당역사박물관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 진달래꽃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사랑하던 그 사람이여!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초혼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 엄마야 누나야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거나 노래로 부를 수 있는 구절들입니다. 김소월의 시는 시대를 뛰어넘어 여전히 한국인의 마음을 대변하고, 또 위로하고 있습니다.

제공: 스토리

배재학당역사박물관

기획: 최종희
도움: 한총
총괄: 한지영
진행: 김유정, 이현주, 이슬기
보조: 김하정

참여: 모든 표현 수단
일부 스토리는 독립적인 제3자가 작성한 것으로 아래의 콘텐츠 제공 기관의 견해를 대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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