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은 옥중에서 총 300여점을 제작했는데 감옥에서의 생활이 시작된 초기인 1967년의 작품들은 서정적인 1960년대 중반 문자추상에서 나타나는 경쾌한 조화로움 대신 혼란스러운 작가의 심정이 반영된 듯 파편화된 선과 형태들이 서로 뒤엉킨 모습이 나타난다. 특히 후반기로 갈수록 그가 예술가임을 알게 된 간수나 주변 사람들의 배려로 조금씩 작업에 필요한 재료를 받을 수 있었던 데 반해, 제대로 된 재료가 없던 초기에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 누런 종이 위에 흰색 물감으로 그린 이 작품은 배경을 칠하여 형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제작한 것으로, 거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거친 선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어, 당시 작가가 직면한 심리적 충격을 짐작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