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나라, 신라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는 4세기 중반 마립간이라는 지배자를 중심으로 고대 국가의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경주 시내에 남아 있는 거대한 무덤들은 바로 마립간 시기의 왕과 왕비 그리고 귀족의 무덤들이다. 마립간과 그 일족은 금관 등 금·은·금동으로 화려하게 세공한 여러 가지 장신구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였다. 황금은 최고 권력의 상징이었다.

신라의 지배자, 마립간
신라가 금제품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4세기 중반부터로 추정된다. 이때 신라는 김씨가 왕위를 세습하기 시작했고 왕의 호칭도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뀌었다. 마립간은 동북아시아에서 지배자를 가리키는 ‘간(Khan)’에 최고를 뜻하는 ‘마립’을 더한 말로 최고의 지배자를 의미한다. 마립간은 제17대왕인 내물마립간(재위 356~402)부터 지증왕(재위 500~514)이 중국식 호칭인 ‘왕王’으로 바꿀 때까지 사용되었다. 이 기간 동안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중국의 전진(315~394)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전개하였다. 신라는 대내외적 발전을 바탕으로 선비족 등 북방유목민족과의 교류하면서 황금문화를 꽃피웠다.
거대한 무덤
마립간의 등장과 더불어 경주 시내 중심부에는 지금까지는 볼 수 없던 거대한 무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큰 무덤은 지름이 80m, 높이가 20m가 넘어 멀리서 보면 작은 산봉우리처럼 보인다. 무덤은 평지에 장방형으로 묘광을 파고 그 안에 덧널을 설치한 후 덧널 주위를 냇돌로 채우고 다시 그 위에 봉토를 씌워 완성한다. 그리고 무덤 둘레에는 몇 단의 호석을 쌓아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였다. 무덤의 내부 구조는 시간에 따라 변화였는데, 처음에는 시신을 안치하는 주곽과 부장품을 넣는 부곽을 설치하였으나 나중에는 주부곽을 나란히 설치하거나 주곽의 내부를 구획하여 부장품을 넣기도 하였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신라의 금공품은 이러한 무덤에서 발견된 것들로 신라의 지배층이 가졌던 금에 대한 특별한 인식과 그에 부여했던 상징과 의미를 보여준다.
금관
신라의 관은 재질에 따라 금관, 금동관, 은관, 동관으로 나뉘어진다. 이 가운데 은관은 초기에 동관은 말기에 일부 보이므로 전형적인 신라관은 역시 금관과 금동관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의 금관은 총 6점이다. 그 가운데 황남대총 북분,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에서 출토된 5점의 금관은 관의 제일 아래쪽에 관테가 원형으로 돌려져 있고 그 위에는 나뭇가지 모양과 사슴뿔 모양의 장식을 덧붙여 세운 전형적인 형태이다. 금관은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시기 신라의 왕은 4명 뿐이다. 따라서 금관은 왕의 전유물이 아니라 그 왕비나 가족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금관이 발견된 황남대총의 북분은 피장자가 여성이었으며 금령총의 경우에는 어린 소년이었다.

경주시 노서동路西洞에서 1921년에 우연히 발견된 전형적인 신라의 금관金冠이다. 가지런한 긴 관테에는 위아래 가장자리에 길게 점무늬와 물결무늬를 새겼고, 가운데에 볼록 장식을 한 줄 넣었다. 나뭇가지 모양의 세움장식은 맞가지 세 개와 엇가지 두 개를 조합하였다. 맞가지 세움장식은 직각에 가깝게 꺾인 마디가 세 단이고, 줄기와 가지 사이가 넓다. 세움장식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점무늬를 한 줄씩 넣었고, 줄기 및 가지의 끝과 마디마다 볼록장식도 넣었다. 관테의 양끝은 연결하지 않았는데, 다른 재질을 덧붙여 묶었던 듯하다. 관테와 세움장식은 대갈못으로 결합하였고, 달개와 곱은옥을 따로따로 엮어 꾸몄다. 또한 관테의 아래에는 한 쌍의 긴 드리개가 있다. 드리개는 귀걸이 모양의 딸림꾸미개와 사슬에 달개와 곱은옥을 매단 으뜸 꾸미개로 구성되었다.

1973년에 경주 황남동皇南洞 155호 무덤에서 발굴된 전형적인 신라의 금관이다. 이 무덤은 천마天馬를 그린 말다래가 출토되어‘천마총天馬塚’이라 이름 붙여졌다. 이 금관의 형태와 제작기법은 금관총의 것과 전체적으로 같으나 무늬와 맞가지의 마디 수에서 조금 차이를 보인다. 관테의 가장자리 무늬에는 작은 동그라미를 더 새겼고, 세움장식의 점무늬는 두 줄이다. 맞가지 세움장식은 마디가 네 단이며, 줄기와 가지가 훨씬 더 빽빽해졌다. 달개와 곱은옥도 앞 시기의 금관보다 많이 달았기에 전체를 뒤덮은 모양새이다. 맞가지 세움장식은 다른 금관의 것에 비해 한 장의 금판에서 잘라낸 부분이 가장 적은데 금관을 매우 효율적으로 활용하였음을 보여준다. 관테의 아래에는 한 쌍의 긴 드리개가 있다. 드리개는 귀걸이 모양의 딸림꾸미개와 달개를 매단 매듭을 쭉 이어붙인 으뜸꾸미개로 구성되었다. 이 관은 디자인적으로 가장 완성도가 높고 화려한 것으로 평가된다.

경주시 교동校洞의 어느 무덤에서 도굴되었다가 1972년에 압수된 금관이다. 관테는 앞이 넓고 양 끝이 좁다. 원래의 관테는 짧았으나 뒤에 금판을 덧대어 늘였던 것 같다. 세움장식은 나뭇가지 모양으로 세 개이며, 관테에 대갈못으로 고정하였다. 세움장식의 맞가지는 마디가 한 단 뿐이며 양 끝이 옆으로 벌어졌다. 일반적으로 가장자리에는 점무늬 또는 물결무늬를 새기는데, 이 관은 민무늬인 점이 특이하다. 세움장식의 끝과 마디에는 볼록 장식이 있으며, 여기에 하트 모양의 달개를 달아 강조하였다.
나머지 부위에는 둥근 달개를 바느질하듯 이어서 매달았는데, 뒤에 덧댄 관테의 양 끝에는 달개가 없다. 오늘날까지 발견된 여섯 개의 신라 금관 가운데 가장 오래된 시원형식始原型式이며, 실제 나뭇가지에 가깝게 본뜬 세움장식이 특징적이다. 금구슬을 엮은 금실로 관테의 양 끝을 묶는 등 일반적인 양상에서 벗어난 점도 확인되는데(오른쪽 사진), 이것은 도굴된 이후에 손질된 것으로 생각된다.

관모
관모는 금관과 함께 착용자의 사회적인 지위, 즉 신분을 나타내는 중요한 장신구이다. 재료에 따라 금, 은, 금동, 백화수피(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것으로 구분되는데, 금제품은 왕 만이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형태는 고깔 모양이지만 예외적으로 위가 각진 것도 있다. 하단의 테두리에는 여러 개의 구멍이 촘촘하게 뚫려있는데 이 곳에 천을 덧대어 양쪽에서 내려 묶어 썼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관모로는 황남대총 남분과 금관총, 천마총 출토품이 있다. 이 가운데 황남대총 남분의 관모는 은제품으로 모자 앞부분에 용무늬가 맞새김된 금동판을 덧대었으며, 부분적으로 도금하여 황금빛이 나도록 하였다. 금관총과 천마총의 관모는 화려한 무늬의 맞새김판을 여러 장 엮어 만들었다. 관모는 신라 금속 공예기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전형적인 신라의‘고깔 형태의 관’이다. 고깔은 다양한 무늬를 새긴 여러 조각의 금판을 이어 붙여 만들었다. 주된 무늬는 맞새김으로 새긴 용과 C자, T자, 그물 무늬이다. 꼭대기는 두 장을 맞붙여 만들고, 가운데는 한 장의 금판을 절반 접어 이어붙였고, 아래는 또 한 장의 금판을 가운데 것과 같이 접어서 붙였다.
가운데 및 아래의 금판에서 접힌 부분은 고깔의 뒤쪽 외곽선이므로 무늬를 새기지 않았다. 두 금판의 위쪽에는 눈금을 새긴 좁은 금띠를 대갈못으로 박아 덧대었다. 이 금띠는 금판과 금판 사이의 이음매를 가리기 위한 것이다. 꼭대기의 가장자리에는 금테두리를 덧씌웠고, 가운데 금판에는 뒤쪽에 볼록 장식을 덧대었다. 앞쪽의 오각형 장식은 T자 무늬를 맞새김한 바탕과 가운데의 그물무늬를 맞새김한 네모꼴 판을 조합하여 만들었다. 맨 아래에는 긴 금띠 한 장으로 테두리를 덧대었다. 이 관모는 고깔의 앞부분을 만들지 않았고 곳곳에 구멍이 있는 점으로 볼 때, 유기물로 만든 원래 고깔의 겉면을 꾸미는 금장식판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황남동 98호 무덤’이라 불렸던 황남대총皇南大塚은 거대한 무덤 두 개를 맞붙여 쓴 쌍무덤이다. 1973년에서 1975년까지 이루어진 발굴 결과, 왕과 왕비의 무덤일 것이라 여겨져 황남대총이라 이름 지어졌다. 이 ‘고깔 형태의 관[冠帽]’은 이등변삼각형의 꼭지를 활 모양으로 도려낸 은판 한 장과 오각형의 금동판과 은판 각 한 장을 조합하여 만들었다. 앞의 것은 고깔의 몸통이 되며, 뒤에 것은 관꾸미개를 끼우는 부속이다. 꼭지를 도려낸 이등변삼각형의 은판은 아래를 밖으로 조금 접어 날카롭지 않게 테두리를 만들고, 볼록 장식과 번개무늬를 두들겨 도드라지게 나타내었다. 번개무늬 주변에 도금을 하고 달개를 달았으며, 테두리 바로 위에는 끈을 다는 구멍을 네 곳에 연이어 뚫었다. 그 다음 절반으로 접어 둥근 꼭대기의 고깔을 만들었는데, 앞과 꼭대기는 대갈못을 박아 벌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앞쪽의 오각형 장식은 은판 바탕에 용무늬를 맞새김한 금동판을 덧씌운 것으로, 고깔의 번개무늬에 맞춰 대갈못으로 고정시켰다. 고깔과 오각형 장식의 사이는 조금 벌어져 있는데, 이는 관꾸미개를 끼우기 위함이다. 함께 출토된 같은 모양의 금동제 관모에는 관꾸미개가 끼워져 있었다. 황남대총 남분 출토품은 이후 신라에서 유행한 귀금속제‘고깔 형태의 관’의 전형이 되었다.

관식
신라인은 머리에 깃털이나 날개모양 장식을 즐겨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관식은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는 새 모양이다. 초기의 것은 관모의 앞쪽에 끼워진 채로 출토된 예도 있지만 6세기 이후로는 관식이 점차 커지면서 독립된 장식으로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힘찬 새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관 꾸미개이다. 앞판과 양쪽 날개는 대갈못으로 결합하였다. 고깔에 끼우기 위해 앞판의 아랫부분은 혓바닥처럼 만들고 무늬를 새기지 않았다. 앞판의 꼭대기에는 다섯 개의 뾰족한 돌기가 있다. 앞판의 윗부분을 비롯하여 양쪽 날개에는 용무늬를 새겼는데, 너무 추상화되어 흡사 덩굴무늬처럼 보인다. 날개의 용무늬는 대칭을 이루지만, 앞판의 것은 비대칭이다. 관에 끼워지는 부위를 제외한 나머지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점무늬를 새겼으며, 빼곡하게 달개를 달았다. 앞면과 달리 뒷면에는 고깔에 맞붙는 부위에만 달개를 달지 않았는데, 이를 통해 고깔과 조합되었을 때의 모양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꾸미개는 가운데를 세로로 꺾어 고깔에 끼워 썼다. 앞판은 고깔에 바짝 붙고 날개의 끝은 고깔의 뒤쪽 위로 솟구친 모습이 된다.

금관총 출토품과 매우 닮은 새 날개모양 관 꾸미개이다. 앞판과 양쪽 날개는 대갈못으로 결합하였다. 고깔에 끼우는 부위에는 쇠못이 박혀있다. 앞판의 꼭대기에는 세 개의 뾰족한 돌기가 있다. 변형된 용무늬를 새겼는데, 금관총 것보다 훨씬 더 추상화되어 덩굴무늬에 가까우며 모두 비대칭이다. 용무늬에는 점무늬를 새겼으며, 가장자리에는 직선과 물결 모양의 점무늬를 새겼다. 달개는 앞면에만 달려있는 점이 금관총 출토품과 다르다.

한 장의 금판으로 만든 독특한 관 꾸미개로 새 날개 모양과 나비 모양을 합친 듯한 형태이다. 일반적으로 뾰족하게 나타내는 가운데 돌기는 둥근 꼭지처럼 만들었으며, 양쪽 날개는 매우 짧다. 고깔에 끼우는 부위에 못 구멍이 있다. 드러나는 윗부분에는 뒤집어진 하트무늬를 맞새김으로 여러 개 새겼고, 가운데 돌기에는 마름모무늬도 하나 넣었다. 가장자리와 무늬 주변에는 점무늬를 찍었다. 달개는 바느질을 하듯 금실로 여러 개를 이어 매달았다. 전체적으로 모양과 무늬는 좌우 대칭을 이룬다.

드리개
드리개는 금관이나 금동관의 화려함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관테의 둘레에 장식한 것이다. 형태는 상하로 길쭉한 나선모양의 장식 여러 개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귀걸이와 비슷하지만 길이나 출토 위치에 따라 구분된다.

오늘날까지 알려진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신라의 금제 드리개는 경주 월성로月城路 가-13호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드리개는 일반적으로 관 아래에 드리우는 꾸미개이며, 귀걸이와 형태적으로 비슷하나 샛장식이 긴 것이 다르다. 이 드리개는 굵은 고리 아래에 가는 고리가 있고, 달개를 매단 매듭을 쭉 이은 샛장식을 사이에 두고 그 아래에 금구슬과 나팔모양의 드림을 달았다. 샛장식의 매듭은 아래위로 고리를 지운 굵은 금실의 겉면에 가는 금실을 촘촘히 덧감아 만들었다. 가는 금실을 덧감을 때 아래위 두 곳에서 십자로 뽑아낸 고리에 달개를 매달았다. 이러한 매듭은 드리우는 용도의 금속제 꾸미개에서 사슬과 더불어 널리 쓰였다. 나팔모양의 드림과 바로 위의 고리에는 작은 유리구슬을 끼웠다.

달개로 꾸민 금구슬을 엮어 만든 드리개인데, 무덤에 묻힌 이후 구슬의 특성상 흐트러져 원래 모양을 완전히 복원하기 어렵다. 금구슬은 두 개의 반구半球를 붙여 만들었고, 이음매에 달개를 엮어 꾸몄다. 이러한 귀금속제 구슬은 주로 목걸이에 많이 쓰이는데, 특이하게 드리개에 쓰였다. 길게 드리운 으뜸꾸미개에는 큰 곱은옥을 달았고, 두 줄 혹은 세 줄인 딸림꾸미개에는 작은 곱은옥을 드림으로 달았다. 이 드리개에는 다른 것에 대부분 있는 고리가 없다. 하지만 이 드리개가 굵은고리 귀걸이와 함께 출토된 발굴 정황은 원래 모양을 추측해볼 수 있게 한다. 즉 신라의 드리개에는 흔히 귀걸이 모양의 딸림꾸미개가 있는데, 이로 보아 이 드리개는 귀걸이로 알려진 것과 합쳐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귀걸이
신라의 대형 무덤을 발굴 조사하면 예외없이 금으로 만든 귀걸이가 다량 출토된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신라의 귀걸이는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여 신라인들의 미적감과과 수준 높은 금속공예기술을 잘 보여준다. 귀걸이는 형태가 매우 다양하며 고리의 굵기에 따라 굵은고리귀걸이와 가는고리귀걸이로 구분된다. 굵은고리귀걸이의 경우 기본 형태는 통일되어 있지만 가는 고리 귀걸이는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황오리14호 무덤이나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귀걸이는 비교적 작고 간결하며,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출토품은 매우 복잡하고 화려하며 길쭉하게 생긴 것도 출토된다. 이로 볼 때 신라의 귀걸이는 간결한 것에서 점차 복잡하게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가는고리에 긴 으뜸꾸미개와 짧은 딸림꾸미개가 한꺼번에 달린 귀걸이이다. 딸림꾸미개는 아래 위의 두겁 사이에 작은 고리를 여러 개 이어 붙여 만든 원통모양의 샛장식과 하트모양의 드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신라의 전형적인 가는고리 귀걸이와 똑같은 모양이다. 으뜸꾸미개는 사슬과 금실로 길게 드리웠는데 다양한 드림으로 꾸몄다. 맨 위 샛장식에는 고리를 붙여 만든 반구체半球體에 펜촉과 하트 모양의 달개를 달았다. 가운데 샛장식에는 작은 고리와 유리구슬을 합쳐 큰 구슬을 만들고, 세 개의 작은 하트모양 드림을 달았다. 맨 아래에는 큰 하트모양의 드림을 달았다. 하트모양의 드림에는 가운데에 다른 재질을 끼울 수 있도록 턱을 마련하였는데, 가운데가 채워지면 전체적으로 완전한 하트모양을 이룬다. 아울러 으뜸꾸미개에서 사슬과 사슬 사이에 있는 금실에도 다른 재질을 끼워 꾸몄을 것이나, 지금은 확인할 수 없다.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많은 귀걸이가 확인됐다. 가는고리 귀걸이는 두 종류가 출토되었다. 사이장식으로 속빈 구슬을 사용한 것과 구형장식을 사용한 것이 있다. 구조가 간단하며 크기도 작다.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많은 귀걸이가 확인됐다. 가는고리귀걸이는 두 종류가 출토되었다. 사이장식으로 속빈 구슬을 사용한 것과 구형장식을 사용한 것이 있다. 구조가 간단하며 크기도 작다.

금관총 나무널 동쪽에서 발견된 복잡한 양식의 귀걸이다. 드림은 두 개로 하나는 상하에 작은 심엽형 달개들을 금사로 연결해 붙였다.

황남대총 북분의 나무덧널 상부 동남쪽에서 출토되었다. 너비 2cm의 굵은고리太環은 연결부분이 뚫어져 있다. 연결고리 아래의 긴 줄은 펜촉 모양의 드림 장식이고, 짧은 줄은 심엽형 드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금관총 나무널 동쪽에서 발견된 복잡한 양식의 귀걸이다. 드림은 두 개로 하나는 상하에 작은 심엽형 달개들을 금사로 연결해 붙였다.

사이장식은 금판을 둥글에 말아 틀을 만들고 그 속에 녹색 유리구슬을 1개씩 끼워 넣었다. 사이장식 아래로는 심엽형의 드림을 하나씩 매달았다. 전체적으로 간결한 형태이나 유리옥으로 인하여 장식 효과가 돋보인다.

천마총에서는 널 안과 주변, 덧널 내부, 부장품 궤 등에서 귀걸이가 출토되었다. 심엽형 드림이 달린 귀걸이는 무덤 주인공이 착용했던 것으로 서봉총과 보문동합장분에서도 비슷한 귀걸이가 출토되었다. 뾰족한 모양의 드림이 특징이며 표면에는 금알갱이와 돋을 띠를 붙였다. 6세기에 들어서면서 귀걸이는 점차 화려해졌다.

천마총에서는 널 안과 주변, 덧널 내부, 부장품 궤 등에서 귀걸이가 출토되었다. 심엽형 드림이 달린 귀걸이는 무덤 주인공이 착용했던 것으로 서봉총과 보문동합장분에서도 비슷한 귀걸이가 출토되었다. 뾰족한 모양의 드림이 특징이며 표면에는 금알갱이와 돋을 띠를 붙였다. 6세기에 들어서면서 귀걸이는 점차 화려해졌다.

초기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신라이 다른 귀걸이와 비교할 때 작고 간소한 편이다. 중심 고리에 노는 고리를 걸고 그 아래쪽에 사이장식을 연결하였다.

목걸이
신라의 무덤에서는 대부분 크고 작은 남색의 유리구슬을 꿰어 만들었다. 그 가운데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대형무덤에선는 금으로 만든 목걸이가 출토된다. 어떤 것은 금제곡옥, 금구슬, 달개장식 등을 이용하여 만들어 화려하다.
가슴걸이
가슴걸이는 가슴 앞쪽에 늘어뜨리는 목걸이와 달리 가슴 앞에 드리우는 것을 말한다. 대부분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에서만 출토되어 무덤 주인공의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척도로 여겨진다. 가슴부분에 중심 장식을 드리우고 등 부분은 가슴쪽의 구슬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구슬을 만들어 늘어뜨리듯 두 가닥의 장식을 드리웠다. 장방형의 금장신구와 금구슬에도 달개를 매달아 장식성을 더했다.

초기형식의 가슴걸이로 남색 유리구슬을 7줄로 엮고 맨 아래쪽에는 커다란 녹색 곱은옥 1개를 매달았다. 중간 중간에 끼운 금제 장방형 장식은 여러 가닥의 유리구슬이 서로 엉키지 않도록 하는 구실을 한다.

능묘 주인의 가슴 부위에서 출토되었다. 출토된 상태를 그대로 옮겨온 것이기 때문에 본디 착용하였던 모습을 되살려 볼 수 있다. 즉 가슴 쪽은 U자형으로 늘어뜨리고, 양끝의 일부는 등 뒤로 넘겨서 착용하였다. 푸른빛의 둥근옥과 속이 빈 금·은제 구슬을 이어서 여섯 줄로 엮고, 네모기둥 모양의 금장식을 중간에 넣어서 가슴 쪽은 다섯 줄, 등 쪽은 세 줄이 되도록 고정하였다. 등 쪽의 둥근옥은 가슴 쪽에 비해서 크기가 작고 금·은제의 구슬도 없는데 비하여, 가슴 쪽과 등 쪽 끝에는 벽옥제 곱은옥을 각각 한 점씩 매달아 장식성을 높였다. 이와 같은 가슴걸이는 신라 지배계층의 상징적인 껴묻거리[副葬品]로 많이 애용되었다.

반지
반지는 금은장신구가 나온 무덤에서 적게는 한 점에서 많게는 여러 점이 한꺼번에 출토된다. 때로는 무덤 주인공의 손에 끼워진 채 발견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무덤의 부장궤나 덧널 상부에서 발견된다. 금판을 둥글게 말아 만들기도 하고, 유리옥을 끼워 장식한 것도 있다. 황남대총 남분의 출토품처럼 반지의 앞부분을 꽃잎처럼 넓게 만들고 그 안에 금알갱이와 청색 유리옥으로 장식한 화려한 것도 있다.

금관총 출토 금반지는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반지의 윗면을 마름모꼴로 조금 넓게 만들고 새김눈으로 장식한 띠를 붙여 중앙부를 장식한 것이다. 두 번째는 윗면을 마름모꼴로 만들고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은 것이다. 세 번째는 반지의 폭이 모두 같고 표면에 격자문을 새긴 것으로 다른 종류에 비해 비교적 얇다.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모두 19점의 반지가 출토되었다. 피장자가 끼고 있던 반지는 오른손에 3개 왼손에 2개였다. 표면에 아무 무늬가 없이 윗면을 마름모꼴로 넓힌 것과 표면에 격자문을 새긴 것 두 종류가 있다.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모두 19점의 반지가 출토되었다. 피장자가 끼고 있던 반지는 오른손에 3개 왼손에 2개였다. 표면에 아무 무늬가 없이 윗면을 마름모꼴로 넓힌 것과 표면에 격자문을 새긴 것 두 종류가 있다.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18점의 반지가 출토되었다. 모두 껴묻거리 상자나 넛널 상부에서만 출토되었다. 반지의 앞면을 마름모꼴로 만들고 그 표면에 꽃잎모양으로 금알갱이를 붙여 장식하였으며 그사이에는 작은 유리구슬을 끼워 넣었다. 이 반지는 함께 출토된 금방울과 함께 신라의 누금세공품 중에서 빠른 시기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리띠
신라 허리띠의 특징으로는 길게 늘어뜨린 드리개를 꼽을 수 있다. 진 또는 삼연식 허리띠에서는 볼 수 없는 요소로 금제와 은제 허리띠에서만 확인된다. 평소 즐겨 사용하는 물건을 허리띠에 매달고 다니던 북방 유목민족의 풍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드리개 끝에는 향낭, 약통, 물고기, 숫돌, 집게, 곱은옥, 손칼 등의 형상을 한 장식을 매달았다. 약통은 질병의 치료와 관련된 것이고 곱은옥은 생명, 물고기는 식량 또는 다산, 숫돌과 집게는 철기 제작과 관련된 것으로 왕이나 제사장이 관장했던 여러 가지 일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무덤에서 황금이 사라지는 시점인 6세기 중엽이 되자 기존의 삼엽문을 맞새김했던 형태가 사라지고 새로운 허리띠 꾸미개가 유행하였다. ‘누암리형 허리띠 꾸미개’라고 불리는 유형으로 비교적 작은 규모의 무덤에서 출토되고 띠고리, 띠꾸매, 띠끝장식 등 간단한 부품으로 구성되는 것이 특징이다.

마흔 매의 띠꾸미개에 열일곱 줄의 띠드리개가 드리워진 화려한 금제 허리띠꾸미개이다. 띠꾸미개는 네모꼴에 하트모양 드림이 달렸으며, 덩굴무늬에서 유래된 세잎무늬를 맞새김하고 달개로 화려함을 더했다. 네모꼴은 허리띠 겉면에 대갈못으로 나란히 붙였던 것인데, 허리띠가 썩어 없어지고 꾸미개만 남았다. 띠드리개에는 타원형과 네모꼴을 이어 붙인 것과 금구슬을 끼운 사슬로 된 것이 있는데, 맨 아래에 긴 네모꼴과 여러 형상을 드림으로 달았다. 드림에는 질병을 다스리는 약병 또는 향수병,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물고기, 용무늬를 새긴 장식, 곱은옥, 숫돌을 끼웠던 두겁 등이 있다. 특히 가장 길고 큰 으뜸 띠드리개의 끝에는 방울이 세 개 달려 있다. 이 허리띠꾸미개는 띠고리가 화려한 덩굴모양이고, 띠드리개의 타원형 연결부분이 오목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는 띠고리가 단순한 C자 모양이며, 타원형 연결부분이 편평한 것보다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마흔 매의 띠꾸미개에 열세 줄의 금제와 두 줄의 금동제 띠드리개를 드리운 전형적인 신라의 허리띠꾸미개이다. 띠꾸미개는 세잎무늬를 맞새김하였으며, 띠고리와 연결된 첫번째 네모꼴에만 달개를 달았다. 금제 띠드리개는 한 줄만 사슬이고 타원형과 네모꼴을 이은 형태가 대부분이며, 긴 네모꼴과 여러 형상을 드림으로 달았다. 드림의 형상은 긴 육면체를 끼운 두겁, 곱은옥, 원통모양 두겁, 유리구슬, 족집게, 용무늬를 새긴 작은 칼, 향이나 약을 넣었던 주머니, 물고기 등이 있다. 이 중에 나무를 금판으로 감싼 긴 육면체는 숫돌을 본뜬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으뜸 띠드리개는 크고 작은 타원형을 이은 형태로, 가장자리에 따로 테두리를 붙이고 달개를 달아 꾸몄다. 작은 타원형은 오목한 두 판을 이어 붙인 납작한 공모양이며, 큰 타원형은 가운데가 오목하다. 두 개의 금동제 띠드리개는 금동제 및 유기질 끈으로 따로 드리웠는데, 드림으로 큰 물고기 모양을 달았다.

뒤꿈치 부분은 남아있으며 바닥판 전면에 단면이 네모난 못을 박은 고구려 금동신과 유사한 형태이다. 바닥판에는 최소 33개 이상의 사각추 형태 못이 박혀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옆면은 T자를 교차시킨 문양을 맞새김하고 군데군데 달개를 달았다. 신발 안쪽에는 마麻에 붉은 색 비단을 감쌌던 흔적이 있다.

전형적인 신라식 금동신발로 내부에 천을 부착했던 흔적이 있다. 피장자에 발치에서 출토된 것을 볼 때 시신에 신겨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릇
돌무지덧널무덤의 부장궤는 금은보화 등 갖가지 부장품과 함께 외국에서 들어온 진귀한 물품들을 넣었다. 금, 금동그릇도 마찬가지로 부장궤에서 다수 발견되었다. 966년 아랍의 지리학자 알 마크디시(Al-Maqudisi)는 ‘신라에서 밥을 먹을 때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라고 기록했다. 토기 대신 귀한 금 등의 금속으로 만든 그릇을 쓴 것이다. 이러한 금그릇, 은그릇 등 금속제 그릇은 왕과 왕족의 무덤에서 주로 나온다. 주인공의 머리맡에 둔 부장궤 안에 차곡차곡 들어있는 예도 있다. 금그릇은 왕의 무덤일수록 부장한 수량이 많고 굽다리접시, 합, 완, 바리 등으로 그 종류도 다양하다.

황남대총 북분北墳에서는 금으로 만든 굽다리접시가 여덟 개 출토되었는데, 달개를 단 큰 것 네 개와 이보다 작고 달개가 없는 것 네 개이다. 이밖에 금동과 은으로 만든 굽다리접시도 출토되었다. 귀금속제 굽다리접시는 흙으로 구운 것과 매우 닮았다. 이것들은 뚜껑이 따로 없는 형태이며, 모두 귀금속판을 두드려 만들었다.
접시는 민무늬이며 바리처럼 깊다. 아가리는 날카롭지 않게 밖으로 조금 접어 테두리를 만들었고, 테두리 아래에 일곱 개의 달개를 달아 꾸몄다. 굽다리는 아래위로 서로 엇갈리게 네 개씩 네모난 구멍을 뚫었고, 아래 위 구멍 사이에 금판을 꺾어 두 줄의 돋을띠를 나타내었다. 굽다리의 아래 끝에는 따로 U자 모양으로 접은 테두리를 끼웠다. 접시와 굽다리는 굽다리 윗부분에 촉을 내고 접시에 구멍을 뚫은 다음 서로 끼워 조립하였다.

합은 뚜껑이 있는 바리로,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거의 같은 은합 세 개가 포개진 채 출토되었다. 뚜껑과 바리는 은판을 두드려 만들었다. 뚜껑은 아가리를 밖으로 조금 접어 테두리를 돌렸고, 세 가닥으로 뻗은 이파리모양의 받침에 둥근 고리가 달린 꼭지를 달았다. 바리는 약간 턱이 진 편평한 바닥이며, 아가리의 가장자리를 접어 테두리를 돌렸다. 꼭지와 아가리에만 도금을 하여 꾸몄다.

구불구불한 자루에 고리를 붙인 특이한 국자이다. 철제 세발솥[鐵鼎] 옆에서 세 개가 한꺼번에 출토되었는데, 자루의 휜 정도와 방향만 조금 다를 뿐 모양이 거의 똑같다. 은판 한 장을 이용하여 액체를 뜨는 부위와 자루를 두드려 만들었다. 자루는 은판을 U자 모양으로 접어 잘 꺾이지 않게 하였다. 액체를 뜨는 부위는 가장자리를 밖으로 접어 날카롭지 않게 테두리를 돌렸다. 자루의 뒷면에는 고리를 대갈못으로 박았다. 자루와 액체를 뜨는 부위가 수평을 이루고 있어 깊은 그릇에 담긴 액체를 뜨기에 다소 불편하다. 독특한 형태로 보아 일상용이라기보다 의식용일 것으로 여겨진다.

큰칼
신라의 대형 무덤에서 출토되는 큰칼은 대부분 금과 은으로 장식하고 칼고리 부분에 용이나 봉황, 세고리, 세잎무늬 등과 같은 상징적인 의장이 달았다. 이런 장식 큰칼은 무기로 사용했다기 보다는 금관이나 귀걸이, 허리띠 등 금은세공품과 마찬가지로 소유자의 신분을 드러내주는 위세품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특히 피장자의 몸 가까이서 발견되는 큰칼은 그가 이승에서 지니고 있던 병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그 칼을 매개로 내세에까지 현세의 권리가 고스란히 이어지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무덤에 넣어준 것으로 생각된다.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갑옷의 부속인 은제 팔뚝가리개이다. 이 무덤에서는 금동으로 만든 팔뚝가리개도 두 쌍 더 출토되었다. 이밖에는 금관총, 천마총, 대구 달성達城 34호 무덤에서 금동으로 만든 것이 출토되었으며, 부산 동래 복천동福泉洞 11호 무덤과 상주 신흥리新興里 나지구 37호 무덤에서 철로 만든 것이 출토되었다. 꽃잎처럼 생긴 가운데 부속은 팔뚝 전체를 가리며, 팔꿈치 쪽이 넓고 팔목 쪽이 좁다. 이 부속에는 중심선을 따라 꽃봉오리 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팔목을 감싸는 부속은 가운데 부속의 양쪽에 경첩을 이용해 달았으며, 팔목 안쪽에서 끈을 걸어 채울 수 있도록 나란하게 세 개씩 걸이를 달았다. 전체적으로 팔뚝에 맞게 둥그스름하다. 가장자리는 날카롭지 않게 밖으로 조금 접어 테두리를 돌렸다.

규모가 비교적 작은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에서 출토되었다. 나무로 만든 칼집의 요소요소에 금판을 씌워 장식하였다. 금판의 표면에는 물결·나뭇잎·원·타원·태극무늬 등 다양한 무늬들을 세금細金기법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무늬들 곳곳에는 붉은 석류석石榴石과 청색 유리들을 박아 넣어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칼집 속에는 철제 단검이 들어 있는 사실이 최근의 조사 결과 밝혀졌다. 이 보검은 흑해 연안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치는 지역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의 왕성한 대외 교류의 실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새로운 시대로
이러한 황금문화는 처음에는 경주에만 한정되었다가 황남대총 남분이 만들어지는 시점에는 지방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6세기에 접어들자 신라는 지방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고 불교의 공인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겪었다. 이에 따라 장례의식도 바뀌면서 더 이상 무덤의 규모를 크게 만들지 않고 금공품을 비롯한 부장품의 양도 급격히 줄어든다. 화려한 금속공예품은 이제 무덤이 아니라 현세에 사용되었다. 특히 불교가 유행하면서 장인들은 불상이나 불교공양구, 사리장식을 제작하였다. 신라 장인의 솜씨는 황룡사터 목탑지의 진단구나 감은사 석탑, 송림사 전탑의 사리장엄구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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