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자료원 50년의 기록 2007 ~현재

디지털 시대의 청사진, 서울 상암동 청사 이전부터 현재까지

한국영상자료원

이지윤(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연구원)

문화콘텐츠센터 개관식(2007)한국영상자료원

디지털 시대 영상문화 아카이브의 허브를 향하여

2007년, 한국영상자료원은 본격화되는 디지털 시대를 맞아 서울 상암동에 조성되기 시작한 ‘디지털 미디어 시티’로 자리로 옮깁니다. 여러 방송사와 미디어 관련 기관들이 모일 이곳은 한국 디지털 콘텐츠 산업의 중심이 될 예정이었죠. 디지털 시대, 영상문화 아카이브의 허브로 도약할 준비를 마치고 상암동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한 한국영상자료원은 디지털 환경에 최적화된 아카이브이자, 많은 이들이 아카이브의 유산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한국영상자료원 상암동 청사 시설(2007)한국영상자료원

본격적인 아카이브 복합 문화 공간의 탄생

3년여의 제반 준비와 공사를 거쳐 2007년 5월, 서울 상암동으로 자리를 옮긴 한국영상자료원은 전문 시설을 갖춘 보존고를 필두로 도서관과 박물관, 영화관을 갖추며 본격적인 아카이브 복합 문화 공간으로 거듭났습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부터 시나리오, 관련 도서들을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는 영상도서관이 제일 먼저 시민들에게 개방됐습니다. 

뒤이어 2008년 5월에 개관한 시네마테크KOFA는 세계 각국의 고전영화와 예술영화, 동시대의 다양한 영화들을 즐길 수 있는 공간입니다. 16mm, 35mm 필름과 디지털 시네마, 3D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상영관(321석)과 독립영화전용관(150석), 교육실 등 총 3개관으로 이루어진 이곳은 국내외 주요 시네마테크에 손색없는 프로그램으로 시네필들에게 중요한 공간으로 부상했고, 지금도 계속해서 그 가치를 확대해 가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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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테크KOFA와 함께 개관한 한국영화박물관은 한국영화의 역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상설전시실과 한국영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전하는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었습니다. 특히 상설전시실은 영화 역사뿐 아니라 기술과 미학, 영화 제작 원리 등을 보고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졌습니다. 2022년에는 상설전시실 내부에 영화 탄생 과정을 조명하는 '초기영화로의 초대' 전시 구역을 새로 마련해, 초기 영화적 상상력을 체험토록 하고 있습니다.

한국영상자료원의 기관지 '영화천국'(2008)한국영상자료원

아카이브 복합 문화 공간 소식지, 영화천국

한국영상자료원이 복합 문화 공간으로 도약한 만큼, 그 소식을 전할 격월간지 『영화천국』도 이 무렵 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2008년 5월부터 2019년 4월까지 발행된 『영화천국』은 한국영상자료원의 여러 활동과 영화계·학술계 동향, 세계 각국의 영상 아카이브 소식들을 발 빠르게 전했습니다. 

시네마테크KOFA 개관영화제 포스터(2008-05-09)한국영상자료원

영화 보물창고가 열린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상암동 시대 개막을 알린 『영화천국』 첫 호는 시네마테크KOFA 개관영화제를 특집으로 다뤘습니다. 일본에서 찾은 16mm 필름(일본어 더빙)과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한국어 35mm 사운드 네거티브 필름을 가지고 복원된 한국 최초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이 공개됐고, 동아시아 각국 필름 아카이브의 수집작이 소개됐습니다. 무엇보다 많은 이들을 흥분시킨 건 현존 가장 오래된 한국 무성 극영화 <청춘의 십자로>의 공개였습니다.

'청춘의 십자로' 발굴 당시: 필름 캔(2007)한국영상자료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

상암동으로 자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은 2007년 말, 한 남성이 오래된 영화 필름을 가지고 한국영상자료원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는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직후까지 단성사를 운영한 부친이 가지고 있던 필름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어했습니다. 그가 들고 온 9개의 필름 캔에는 <세 동무>, <장한몽>, <무지개>, <낙원>, <아리랑> 등 각기 다른 제명이 적혀 있었습니다. 

'청춘의 십자로' 발굴 당시: 백화된 필름(2007)한국영상자료원

하지만 발화점이 낮은 질산염 필름인데다 일부는 부패했고 전반적으로 수축이 심해 영화의 정체를 확인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금강키네마의 '청춘의 십자로' 개봉 당시의 전단(1934)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상자료원의 정밀 실사와 고증을 통해 필름의 정체는 <청춘의 십자로>(안종화, 1934)로 판명되었습니다. 이 필름은 일본으로 건너가 장장 8개월에 걸친 복원을 거쳤고, 2008년 5월, 시네마테크KOFA 개관영화제를 통해 비로소 공개되었습니다.

청춘의 십자로 변사 공연 뮤직비디오(2008)한국영상자료원

변사 공연으로 재탄생한 21세기 <청춘의 십자로>

그런데 이때의 공개 방식은 상당히 독특하고 특별했습니다. 무성영화 시기의 관람 방식을 재현해 변사 해설, 배우들의 노래가 어우러진 공연과 함께 공개됐기 때문이죠. <청춘의 십자로> 변사 공연은 폭발적인 관객 호응을 이끌었고, 국내뿐 아니라 멕시코와 런던, 뉴욕, 베를린 등 세계 주요 영화제와 문화행사에 초청되며 지금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영상자료원 '청춘의 십자로' 변사 공연(2008)한국영상자료원

필름 복원을 넘어 사회·문화사 복원으로

이처럼 <청춘의 십자로> 변사 공연은 필름 자체를 복원하는 것을 넘어 당대 사회문화사를 복원하는 시도이자 결과였는데요. 한국영상자료원은 2014년, 창립 40주년을 맞아 또다시 사회문화사 복원에 도전했습니다. 

'이국정원' 스틸(1957)한국영상자료원

한국 최초 한·홍 합작영화 <이국정원> 발굴

한국 최초의 한·홍 합작영화인 <이국정원>(전창근·도광계·와카스기 미쓰오, 1957)은 한국인 청년 작곡가와 홍콩 여가수 사이의 사랑을 그린 아름다운 멜로드라마인데요.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이 영화의 실체가 확인된 것은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국정원' 필름 발굴(2012)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상자료원은 홍콩 어딘가에 있을 필름을 찾기 위해 오랫동안 이곳저곳 수소문을 시작했고, 3년여의 조사 끝에 홍콩 쇼브라더스 자료보관고에서 필름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필름은 초산화증후군과 수축, 탈색, 변색 등 훼손이 심했고 설상가상 사운드 필름은 유실된 상태였죠.

이국정원' 중국어 대본 이국정원' 중국어 대본(1957)한국영상자료원

화면은 일본 이마지카 현상소와 협력해 최선의 복원을 마쳤지만, 유실된 사운드를 되살릴 길은 요원했습니다. 결국 한국영상자료원은 사운드가 유실된 <이국정원> 복원에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먼저, 남아있는 국문 시나리오와 홍콩 쇼브라더스에서 수집한 중국어 대본을 참조해 등장인물의 대사를 채웠습니다. 

이국정원 라이브 더빙 쇼 예고편(2014)한국영상자료원

라이브 더빙 쇼로 복원된 <이국정원>

195,60년대 많은 인기를 누렸던 라디오 드라마 형식에서 착안해, 성우들이 무대 위에서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연기하고 현장에서 직접 여러 효과음을 만들어 내는 ‘라이브 더빙 쇼’로 막을 올렸습니다. 목소리를 잃고 화면의 온전한 ‘빛’마저 잃어가던 <이국정원> 필름은 ‘라이브 더빙 쇼’라는 새로운 방식의 복원을 통해 관객 앞에 다시 서게 된 거죠.

공연 융합 영상 프로젝트 '둥글고 둥글게' 티저예고편(2020)한국영상자료원

공연 융합 영상 프로젝트 <둥글고 둥글게>

<청춘의 십자로>와 <이국정원>이 보여준 가능성은 2020년, 공연 융합 영상 프로젝트로 거듭났습니다. 이번엔 현대사의 중요 기록물인 기록영상이 소재가 되었죠. 한국영상자료원이 기획하고 장민승 감독이 연출한 <둥글고 둥글게>는 5.18민주화운동부터 88서울올림픽까지 굴곡진 한국 현대사를 영상과 음악 그리고 공연장의 조명을 활용해 새로운 시청각 체험으로 전달합니다. 

한국영상자료원 파주 보존센터 색재현실(2021)한국영상자료원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는 자세

한편 이 시기부터 한국영상자료원이 심혈을 기울인 일은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즉 디지털 시대에 발맞춘 영상 아카이빙이었습니다. 전 세계 필름 현상소들의 잇따른 폐업과 세계적 필름 제조사 코닥 필름의 파산 소식이 들려올 즈음, 한국영상자료원 역시 필름 복원과 보존에 디지털 기술을 본격 접목하기 시작했죠. 

마틴 스코세이지가 말하는 하녀한국영상자료원

세계영화재단 후원으로 디지털 옷을 입은 <하녀>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와 공동으로 <열녀문>(신상옥, 1962)을 디지털 복원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영상자료원은 계속해서 디지털 복원·보존 기술을 실험했는데요. 그 대표적인 성과로서 2009년,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가 마틴 스코세이지가 이끄는 세계영화재단의 후원으로 디지털 시네마로 재탄생했습니다.

'오발탄' 복원 전후 비교영상(2016)한국영상자료원

독자 기술로 완성한 <오발탄> 디지털 복원

2016년에는 더욱 발달된 기술을 토대로 <오발탄>(유현목, 1961)이 복원되었죠. 그간 대중에게 공개된 <오발탄> 필름은 1963년 샌프란시스코 영화제 출품을 위해 영어 자막을 입힌 버전으로, 화면의 상당 부분이 자막에 가려져 있었는데요. 한국영상자료원의 독자적인 기술로 영어 자막을 제거하는 작업이 진행됐고, <오발탄>은 마침내 온전한 화면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설국열차' 35mm 릴리즈 프린트한국영상자료원

후대까지 보존될 한국영화 마지막 필름 <설국열차>

하지만 디지털 못지않게 ‘사라져가는 필름’에 대한 보존 중요성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는 26,000여 벌, 13,000여 편의 영화 필름이 보존돼 있습니다. 필름으로 촬영된 마지막 한국영화 <설국열차>(봉준호, 2013)의 필름 역시 소중히 보존되어야 할 우리의 유산입니다. 

한우섭-한규호 컬렉션(2015)한국영상자료원

유실 필름과의 재회, 한우섭·한규호 부자 컬렉션

2015년에 수집된 ‘한우섭·한규호 부자 컬렉션’도 물론입니다. 이 컬렉션은 아버지 한우섭 대표가 1960년대부터 일군 사업을 이어받아 80년대 무렵까지 전국 순회 영사업을 했던 연합영화공사 한규호 대표가 기증한 800여 벌의 필름 컬렉션인데요. 대부분 16mm 프린트지만, 상당수가 유실된 줄로만 알았던 영화 필름이라는 점에서 아카이브적 가치를 지닙니다. 

영화 '오부자' 중 "내가 만일 장가를 가게 된다면"(2023)한국영상자료원

보존율이 희박한 한국전쟁 이전의 작품들이 일부 발견됐고, 국내 두 번째 여성 감독으로 기록되는 홍은원 감독의 데뷔작 <여판사>(1962) 역시 이 컬렉션을 통해 실체가 확인됐죠. 1950년대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코미디 영화 <오부자>(권영순, 1958)의 유일한 필름 역시 이 컬렉션에 포함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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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된 보존을 위한 노력, 제2보존센터 건립

물리적 매체인 필름과 0과 1의 숫자로 기록된 디지털 매체를 더욱 안전하고 체계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한국영상자료원은 2016년, 경기도 파주에 새로운 보존센터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상암-파주 간 이원 보존 체계를 구축해 과거의 유산(필름)과 현재의 유산(디지털)을 보존하기 위해 매진하고 있습니다.

VFX 에셋 공유 플랫폼 i.AM VFX 에셋 공유 플랫폼 i.AM(2024)한국영상자료원

디지털 아카이빙을 위한 새로운 도전

한국영상자료원이 2022년부터 시작한 VFX 소스 데이터 아카이빙은 디지털 유산을 보존하기 위한 혁신적인 사례입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영상이 VFX 기술을 거칠 만큼, VFX 소스 데이터 아카이빙은 미래의 활용 기반을 체계적으로 조성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한국영상자료원은 영상문화에 더 널리 기여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공급자와 수요자 사이에 VFX 에셋 공유와 유통을 매개하는 플랫폼 "i.AM"을 2024년 9월에 론칭합니다.

KOFA Collection: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2022)한국영상자료원

자료의 가치를 깨우는 일, KOFA컬렉션

1974년부터 50년간 한국영상자료원에 모인 자료들은, 때론 사소하고 보잘것없어 보일 때도 있지만, 모두 하나같이 영화 역사를 위한 ‘비장한’ 가치를 품고 있습니다. 2020년부터 공개하기 시작한 KOFA컬렉션은 자료의 진정한 가치를 발굴하고 소개하는 작업입니다. 영화인들의 기증 컬렉션부터 방대한 자료들을 특별한 테마로 엮은 컬렉션까지, 현재 70여 개의 컬렉션이 KMDb에서 공개되고 있습니다.

영화평론가 노만 생애사 구술채록 현장(2022)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들, 영화인 구술 채록

공적 기록의 부재로 벌어진 한국영화사의 틈새를 당대를 지나온 영화인들의 회고를 통해 채우는 작업 역시 한창입니다. 올해로 꼭 20년을 맞은 ‘영화인 구술사 채록 사업’은 감독 김수용, 정창화, 배우 김지미, 이순재 등 지금까지 총 225명의 영화인을 만나 그들의 삶과 영화 인생을 기록했죠. 그들의 입을 통해 전해 듣는 이야기는 곧 한국영화사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기도 합니다.

어린이영화아카데미: 시계 소리(2024)한국영상자료원

미래세대를 위하여

아카이브가 기록하고 보존하는 영화 유산은 당연히 미래세대를 위한 것이죠. 한국영상자료원이 2008년부터 매년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어린이 영화 아카데미’는 일찌감치 미래세대에 주목한 결과입니다. 아이들의 힘으로 영화를 만들고 상영회를 통해 가족, 친구들과 창작의 기쁨을 나누며 얻는 경험은 분명 그들이 만들고 누릴 영상문화의 자양분이 될 테니까요.

나도! 비디오 에세이스트 공모전 대상 수상작: 그림들이 꾸는 꿈(백동엽)(2022)한국영상자료원

과거의 유산과 호흡하기

교육과 공모전 등을 통해 시도하고 있는 비디오 에세이 프로젝트는 고전영화를 재료 삼아 낡은 필름에서 현재를 마주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함으로써, 과거의 유산이 동시대와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미래세대의 영상문화가 또 다른 꽃을 피우고 과거 세대가 남긴 영화 유산과 공존하는 것, 이것이 진정 한국영상자료원이 추구하는 가치가 아닐까요? 한국영상자료원이 걸어온 50년 속에서 ‘과거와 미래를 이어가는 아카이브의 힘’을 발견하셨기를 바랍니다.

제공: 스토리

기획•제작 한국영상자료원
큐레이터 이지윤(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연구원)
진행 이지윤•송은지
번역 더블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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