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자료원
이지윤(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연구원)
유현목의 임꺽정' 촬영 현장(1961)한국영상자료원
스크린 너머의 세상에 대하여
우리는 한 편의 영화에서 감독이 창조한 세상을 봅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집니다. 스크린 위의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어느 것 하나,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죠.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것, 스크린 위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을 향한 우리의 갈증은 자연스럽게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과 영화를 만드는 현장, 스크린 너머 '오프 스크린'으로 향합니다.
그럼, 영화계에 입문한 1950년대부터 마지막 연출작을 내놓은 1990년대까지 한국영화계를 대표해 온 유현목 감독의 오프 스크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유현목의 교차로' 촬영 현장(1956)한국영상자료원
첫걸음의 현장 <교차로>
<교차로>(1956)는 감독으로서 '유현목'의 시작을 알린 작품입니다. 유현목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춘향전>(이규환, 1955)의 조감독을 맡은 후 이듬해인 1956년, 감독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영화 <교차로>를 발표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교차로> 촬영 현장, 골똘히 무언가를 보고 있는 유현목 감독의 뒷모습에서 첫 작품에 대한 책임감과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유현목의 교차로' 홍보 전단 교차로' 홍보 전단(1956)한국영상자료원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교차로> 필름은 현재 유실된 상태입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 당시 만들어진 홍보 전단과 소수의 장면 사진, 촬영 현장 사진뿐입니다.
유현목의 교차로' 스틸(1956)한국영상자료원
영화는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라 대조적인 인생을 사는 쌍둥이 자매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행복을 찾는다는 내용으로, 직전 해에 개봉한 <춘향전>으로 스타덤에 오른 배우 조미령이 두 명의 쌍둥이 자매를 맡아 화제가 되었습니다.
조미령은 부잣집에서 자라 지성과 교양을 갖춘 여대생 현숙과
가난한 집에서 자라 허영심 많은 가정부 옥희를 동시에 연기했습니다.
유현목의 교차로' 스틸(1956)한국영상자료원
유현목 감독은 생김새는 똑같지만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인물을 창조하기 위해, 두 캐릭터의 의상에 차별을 두었습니다. 현숙은 지성과 교양을 갖춘 인물이라는 설정에 따라, 사진과 같이 상하의 맞춤으로 세련되면서도 단정한 복장으로 등장합니다.
유현목의 교차로' 촬영 현장(1956)한국영상자료원
가난하지만 허영심 많은 옥희의 의상은 좀 더 화려합니다. 사진처럼, 유현목 감독은 때로는 목선을 깊이 파고 허리를 잘록하게 잡아 몸매를 드러낸 옥희의 의상을 통해 이른바 '아프레 걸' 이미지를 연출했습니다.
유현목의 구름은 흘러도' 스틸(1959)한국영상자료원
동심의 프레임 <구름은 흘러도>
유현목 감독의 1959년 작품 <구름은 흘러도>는 전후 우리 사회의 아픔을 어린 소녀의 순수한 동심으로 보듬는 수작입니다. 탄광에서 해고된 후 동생들을 위해 서울로 돈을 벌러 간 큰오빠, 큰오빠의 부담을 덜고자 식모가 된 큰언니... 어쩔 수 없이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은 다시 모여 함께 살날을 꿈꿉니다.
유현목의 구름은 흘러도' 트래킹숏(1959)한국영상자료원
이 영화에서 유현목 감독은 어린 소녀의 일상을 따라가며 그의 동심을 서정적인 화면으로 그려냅니다. 그 과정에서 유독 돋보이는 건, 그의 탁월한 감각으로 표현된 '트래킹숏'입니다.
유현목의 구름은 흘러도' 촬영 현장(1959)한국영상자료원
그는 평범한 대화 장면마저 숏-리버스 숏으로 분절하는 편집 대신, 이동차 위의 카메라가 인물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는 트래킹숏을 선택했습니다. 숏을 자르고 잇는 물리성을 배제하고 숏의 연속성을 최대한 살림으로써 인물들의 순수한 마음을 해치지 않으려는 감독의 선택으로 보입니다.
유현목의 오발탄' 촬영 현장(1960)한국영상자료원
희망 없는 현실의 미장센 <오발탄>
트래킹숏은 유현목 감독의 대표작이자 한국영화사의 위대한 정전, <오발탄>(1961)에서 더욱 빛을 발합니다.
유현목의 오발탄' 촬영 착수용 시나리오 마지막 장 여백 면(1960)한국영상자료원
<오발탄>의 트래킹숏은 시나리오 집필 초기 단계부터 염두에 둔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기 버전의 시나리오 마지막 장에는 영화 속 어느 장면의 콘티가 펜으로 간결하게 그려져 있는데요.
정확한 내용을 식별하기는 힘들지만, 트랙을 의미하는 그림과 피사체(인물)의 동선을 나타내는 점선, 그리고 카메라 앵글을 지시하는 실선으로 보아, 이동하는 인물을 따라가는 트래킹숏에 관한 것이리라 추정됩니다.
유현목의 오발탄' 촬영 현장(1960)한국영상자료원
실제 <오발탄> 트래킹숏 촬영 현장으로 가볼까요?
촬영장을 빙 둘러 수많은 군중이 구경하는 가운데, 영화 속 주인공 철호(뒷모습의 검은색 상의 착용 남성, 김진규)가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의 오른쪽에는 트랙이 깔려 있고, 카메라를 실은 이동차가 트랙 위에서 그의 옆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유현목의 오발탄' 트래킹숏(1961)한국영상자료원
정신을 놓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가자"를 외치는 어머니, 돈을 벌기 위해 양공주가 된 여동생 명숙과 은행 강도를 벌인 남동생 영호, 병원에 제때 가지 못해 결국 죽은 아내... 철호의 트래킹숏은 희망 없는 막막한 현실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인물의 내면을 시각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유현목의 김약국의 딸들' 스틸(1963)한국영상자료원
탄탄한 준비의 결실 <김약국의 딸들>
<오발탄>만큼이나 유현목 감독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또 다른 작품 <김약국의 딸들>(1963)은 박경리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한말~일제강점기의 사회 변동 과정에서 인간의 엇갈린 욕망으로 지방 토속 유지 가문이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유현목의 김약국의 딸들' 촬영 현장(1963)한국영상자료원
이 사진은 영화 후반부, 김약국네 셋째 딸 용란이 정신이 나가 바닷가 부두를 헤매는 장면을 촬영 중인 모습입니다. 유현목 감독이 용란 역을 맡은 배우 최지희와 기두 역의 배우 박노식에게 연기 지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현목 감독이 손에 들고 있는 종이가 눈에 띕니다.
유현목의 김약국의 딸들' 콘티(1963)한국영상자료원
그는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콘티를 꼼꼼히 작성한다고 술회한 적이 있는데요. 이 현장에서 그가 들고 있는 것 역시, 아마도 촬영 전에 준비한 콘티였을 것입니다.
그가 직접 작성한 <김약국의 딸들> 촬영 콘티에는 해당 장면의 상황과 등장인물의 대사, 화면 크기와 카메라 위치 및 움직임, 인물의 동선 등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습니다.
유현목의 아낌없이 주련다' 촬영 현장(1962)한국영상자료원
유현목 영화 현장의 산증인: 콘티와 연출 문서들
완벽한 영화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밑 작업으로서 콘티를 중요하게 여겼던 만큼, 유현목 감독은 어떤 촬영 현장에서든 그것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유현목의 성웅 이순신' 촬영 현장(1962)한국영상자료원
유례없는 대작이 될 <성웅 이순신>(1962)의 해상 전투 미니어처 촬영 현장에서도 그는 틈틈이 콘티와 시나리오를 확인하며 완벽한 촬영을 준비했습니다.
유현목의 춘몽' 촬영 현장(1965)한국영상자료원
실험적인 형식을 도입한 <춘몽>(1965) 촬영 현장에서도 그의 손에는 콘티 내지는 촬영 내용이 적힌 종이가 들려 있습니다.
유현목의 공처가 삼대' 촬영 현장(1967)한국영상자료원
코미디 장르답게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로 진행되었을 <공처가 삼대>(1967) 촬영장에서도 그는 배우, 스태프들과 콘티를 함께 보고 토론하며 진정성을 담아 영화를 완성했습니다.
유현목의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스태프 단체 사진(1978)한국영상자료원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1978)의 촬영장에서 제작진과 함께 단체 사진을 찍을 때에도 어김없이 그는 연출 문서를 소중히 들고 있습니다.
유현목의 말미잘' 촬영 현장(1995)한국영상자료원
데뷔작 <교차로>(1956)부터 마지막 연출작 <말미잘>(1994)까지,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42편의 극영화를 남긴 유현목의 영화 현장이 기록된 다양한 사진들에서 변함없이 발견되는 것은 콘티 혹은 시나리오, 때로는 연출 문서를 들고 있는 그의 모습입니다.
유현목의 유현목 소장 콘티북 (박근자 기증)(1994)한국영상자료원
문화유산으로 보존되는 유현목의 연출 세계
유현목 감독이 영화 현장에서 좀처럼 놓지 않았던 그의 연출 자료들은 이제, 그가 남긴 영화와 함께 한국영상자료원에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유현목 탄생 100년 그리고 그의 이름과 작품이 한국영화사의 일조각이 된 지 어언 70년, 완벽한 스크린 세상을 위해 스크린 밖에서 열정으로 기록한 그의 연출 자료들은 지나온 시간만큼 빛이 바래고 얼룩이 묻었지만, 그것을 다시 꺼내보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기획·제작 한국영상자료원
큐레이터 이지윤(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연구원)
영상 편집 이무언
진행 이지윤·송은지
번역 더블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