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왕의 초상화인 어진은 과거 화재로 인해 다수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제7대 왕인 세조의 초상화는 현재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1935년에 세조의 초상화를 이모하는 작업을 한 화가가 보관하고 있던 세조어진의 초본이 남아 있었습니다.
세조어진 초본(1935)국립고궁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은 2016년 11월 임금의 초상인 어진(御眞)과 관련한 유물을 새로 입수하였습니다. 조선 제 7대 임금 세조(1417-1468, 1455-1468 재위)의 어진 초본(草本)을 경매를 통해 구입한 것입니다. 초본이란 작품을 구상하면서 그리는 밑그림이자 정본(正本) 제작을 위한 기초 작업물입니다. 혹은 후에 유사한 그림을 또 그리기 위한 범본(範本)이 되기도 하지요. 세조어진 초본은 반투명한 얇은 종이에 먹선으로만 그려져 있는데, 비록 완성본은 아니지만 세조의 어진이 전하지 않는 상황에서 많은 정보를 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 초본은 누가 언제 제작했고 어떻게 지금까지 남아서 우리 박물관에 들어오게 된 것일까요?
이 초본의 오른쪽 아랫부분에는 ‘金殷鎬印(김은호인)’이라고 새겨진 사각형 도장이 찍혀 있어 근대기의 인물화가 이당 김은호(1872-1979)가 그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김은호는 1912년 서화미술회에 입학하여 조석진, 안중식 등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인물 초상을 그릴 때 사진과 거의 유사할 정도로 얼굴의 음영을 섬세하게 살려 그려내는 솜씨가 특히 뛰어났습니다. 이러한 재능을 알아본 고종의 의뢰로 1913년부터 1935년까지 여러 차례 고종과 순종의 어진을 그렸습니다. 비록 일제강점기의 활동이었지만 김은호를 ‘마지막 어진화사’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이 세조어진 초본은 1935년 김은호가 세조어진을 모사하는 과정에서 그린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 구 왕실 사무를 관장하던 기관인 이왕직(李王職)에서는 이 해 창덕궁 신선원전(新璿源殿)에 모셔져 있던 역대 왕들의 어진 46본을 수리하면서 당시 한 본씩만 남아있던 세조어진과 원종어진은 새로 모사본을 만들었습니다. 조선에서는 어진도 왕과 같이 여겨 진전(眞殿)에 봉안하고 제향을 올렸고, 어진이 낡거나 훼손되면 정성껏 수리하거나 새로 모사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이왕직에서도 이러한 전통을 따라 어진모사를 진행한 것이지요. 이 과정은 『선원전영정모사등록(璿源殿影幀模寫謄錄)』에 기록되어 있고, 벽에 걸린 원본 세조어진을 배경으로 모사본의 채색작업을 하는 김은호의 사진도 전해집니다.
초상이 곧 그 사람이라고 인식되었던 조선시대에는 초상화를 그릴 때 실제 인물을 터럭 하나까지 온전히 닮게 표현하고자 했고, 초상을 모사할 때도 원본을 충실하게 옮겼습니다. 그러니 이 초본도 간략하지만 세조의 실제 얼굴을 꽤 잘 반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림 속 세조는 곤룡포와 익선관 차림으로 두 손을 소매 속에 모으고 정면을 향해 교의에 앉아 있습니다. 볼과 턱에 넉넉히 살이 오른 둥근 얼굴에, 눈썹과 눈매는 약간 처진 듯 하고 코와 입은 작은 편이며 수염은 짧고 숱이 적어 유순하고 앳되어 보입니다. 세조는 동생들을 포함한 정적들을 제거해 가며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했지요. 그래서 사극 등에 등장하는 세조는 늘 비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얼굴이었는데, 실제 얼굴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뜨리는 모습입니다. 날카로운 눈매와 강하게 돌출한 광대뼈로 강인하고 엄격해 보이는 태조어진의 얼굴과 비교하면 세조는 훨씬 부드러운 인상입니다.
김은호의 세조어진 초본은 몇 가지 점에서 전통적인 어진 초본과 다릅니다. 첫째, 전통적으로 초본은 한지에 기름을 먹인 유지(油紙)에 그리지만 김은호는 초본 제작에 유지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세조어진 초본은 가로 70cm, 세로 50cm 정도 크기의 비치는 얇은 황색 종이 6장을 이어 붙여 그린 것입니다. 재료가 달라진 까닭인지 다른 조선시대 초상화 유지 초본과 달리 뒷면에 색을 칠하는 배채(背彩)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조선시대라면 어진의 초본은 화가가 남겨 간직할 수 없는 물건이라는 것입니다. 어진이 완성된 후 초본은 대개 불태우거나 먹을 물에 씻어버린 후 깨끗한 곳에 묻었습니다. 왕 그 자체나 마찬가지인 어진의 초본이 남아 서로 뒤섞이거나 소홀히 간수될까 염려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1935년의 상황을 달랐습니다. 초본은 화가에게 재산이자 밑천이므로 당시 유명 인물화가로 활발히 활동하던 김은호에게 초본을 따로 보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1936년 김은호의 모사 작업이 완료되어 창덕궁 선원전에는 모두 48본의 어진이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이 어진을 비롯한 왕실유물은 한국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옮겨져 동광동에 있던 부산국악원 내 벽돌식 창고에 임시로 보관되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무사히 넘긴 1954년 12월 창고 인근 피난민 판자촌에서 일어난 화재로 유물 대부분이 소실되었습니다. 이때 타고 남은 어진 몇 점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완전한 모습이 아니라서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세조어진은 김은호가 완성한 모사본과 그 원본이 모두 소실되어 그 모습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화가가 보관하고 있던 초본이 다시 세상에 나와 그 모습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
이홍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