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관빈, 옹골찬 사대부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다

경기도박물관은 이번 전시에서 조선 영조 대에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조관빈의 초상화를 처음으로 선보인다. 초상화는 관복본의 전신상을 비롯하여 모두 6점으로, 2016년 6월에 조관빈 초상을 기증받은 후 꼬박 1년 반 만이다. 전시를 통해 이 초상화가 박물관에 기증된 과정과 보존처리 작업 내용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을 것이며, 조관빈이 직접 지은 화상찬을 통해 조선시대 사대부로써의 그의 삶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조관빈 초상(1750)경기도박물관

조관빈과의 만남

기증자 조범식 선생님 댁을 방문했던 그 날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작년 여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선조의 초상화를 집에서 보관하고 있는데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한달음에 달려가 도착한 선생님 댁의 방과 거실에는 조관빈의 초상화 여러 점이 펼쳐져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초상화를 살펴보았다. 또렷한 눈동자, 붉은 입술, 듬성한 수염의 노신(老臣)은 바로 어제 그려진 듯 너무나도 선명했다. 수 백 년이 지난 지금, 조관빈, 그 분이 우리 앞에 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순간 경외롭고 낯선 공기가 느껴졌다. 세상에 아직 공개된 적이 없는 조관빈의 초상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조관빈 초상(1750)경기도박물관

정신을 가다듬고 초상화의 상태를 살폈다. 반신상 두 점은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였고, 오랫동안 말아진 채로 보관된 유지초본은 그대로 굳어져 펴지기가 힘들었으나 심각한 훼손은 없었다. 그러나 전신상 초상은 가로꺾임이 심하고, 일부 찢겨져 벌어진 부분도 있었으며, 갈색 얼룩이 보여 한눈에 보아도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선생님께서는 여름철 제습을 위해 초상화 보관함에 물먹는 하마를 넣어두었는데, 그만 쏟아지는 바람에 얼룩이 생겼다며 걱정을 하셨다. 말아져 있는 초상화에 쏟아진 물먹는 하마는 규칙적인 반원형의 갈색 흔적을 남기고 있었으나, 다행히도 초상 그림부분이 아닌 장황부분에만 있었다. 전신상 초상화의 뒷면을 살펴보니 녹색 단령 부분의 배접지가 삭아서 없어진 상태로, 그림을 말았다 폈다 할 때 마다 안료가 계속 떨어졌다. 사람의 피부가 벗겨져 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경험을 떠올려본다면 아마도 유물의 훼손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조관빈 초상(1750)경기도박물관

우리는 선생님께 유물의 현재 보존상황을 설명 드렸다. 유물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한 적정한 환경에 대해서도 논의했으며, 특히 전신상 초상의 경우 더 이상의 훼손을 막기 위해서는 시급하게 배접을 해야 하고, 물먹는 하마에 의한 얼룩을 완벽하게 제거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습기를 빨아들여서 손상이 지속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고 말씀드렸다.

조관빈 초상(1750)경기도박물관

며칠 후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초상화의 안전을 위해서 고민 끝에 박물관에 기증을 하시겠다는 결심을 전해오셨다. 오로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초상화의 보존만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조관빈 초상 보존처리 과정경기도박물관

조관빈 초상
보존처리 과정

1. 기초조사 및 해체
2. 클리닝작업
3. 보강과 배접, 장황

패이싱경기도박물관

조관빈, 의리를 중시한 노론 계열 사대부

조관빈(趙觀彬, 1691-1757)은 조선 영조 대에 호조판서와 예조판서, 지중추부사와 홍문관 대제학 등 주요 요직을 두루 지낸 사대부이다. 본관은 양주(楊州)이며, 자는 국보(國甫), 호는 회헌(晦軒),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부친은 노론 4대신(老論 四大臣) 중 한 사람인 조태채(趙泰采)이다.

조관빈은 1714년(숙종4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 등 관직을 지냈으나, 1723년(경종3) 신임사화 때 부친과 함께 제주도 흥양현으로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1) 제학으로 기용되어 다시 관직에 오른 후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예조판서, 남한산성 수어사에 임명되었으며, 1753년에는 대제학을 겸하였다. 노론4대신의 신원과 노론의 의리를 실현하려는 그의 주장이 영조의 탕평책과 부딪히면서 여러 차례 사임과 관직임명, 면직, 좌천을 반복하는 등 그의 관직생활은 순조롭지 못하였다. 조선 후기 중앙군의 편성과 진법 등의 내용을 담은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를 편찬하였고, 문집으로는 왕의 명에 의해 지은 국가의례에 사용되는 문장과 악장, 화상자찬을 비롯해 시, 소차, 제문 등을 모아 편찬한 『회헌집(悔軒集)』이 있다.

조관빈 초상(1750)경기도박물관

조관빈의 초상화
조관빈 초상 (전신상, 관복본)

검은 사모(烏紗帽)에 구름과 보배무늬가 섬세하게 짜여진 녹색의 단령을 입은 관리가 두 손을 모은 채 의자에 앉아 있다. 무표정한 주인공의 얼굴에서 까닭 모를 근심과 그리움이 느껴진다. 그림의 주인공은 바로 조선 영조 대의 문신 조관빈이다.

이 초상화는 18세기 중반 사대부 초상화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사모의 모정(帽頂)은 약간 높고, 양쪽으로 뻗힌 사모의 각은 숙종 연간에 비해 끝부분이 약간 넓고, 각의 끝이 둥글다.

단령의 색은 갈매색이라 부르는 어두운 녹색으로 일찍이 숙종 연간에 크게 유행했던 색이다. 단령의 활수 소매는 폭이 넓은 나머지 아래로 푸짐하게 늘어져 있으며, 오른쪽의 단령이 벌어진 틈새로는 푸른색 안감과 받쳐 입은 옅은 옥색의 철릭자락이 살짝 보인다.

가슴에는 문관 당상관을 나타내는 쌍학문양의 흉배를 달고 있으며, 허리에는 서대(犀帶)를 두르고 있다. 조관빈은 여러 판서직을 역임했으며, 마지막 벼슬은 지중추부사였는데, 모두 정2품에 해당되는 관직이다. 정2품에 해당하는 삽금대(鈒金帶)를 둘러야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이처럼 실제보다 한 단계 높은 서대를 그려 넣는 경우도 간혹 있다.

의자에는 호피(虎皮)가 깔려 있는데, 호피는 18세기 이후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요소로서 조선 말까지도 크게 유행하였다. 목화를 신은 두 발은 화문석으로 장식된 직육면체의 족좌대 위를 가볍게 딛고 있다.

이제 초상의 주인공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자. 얼굴 전체는 약간 어두운 살구색톤으로 갈색기 도는 조금 더 짙은 색으로 눈주위와 빰의 이목구비를 묘사하여 입체감을 살렸다. 약간 아래를 보는 듯한 시선, 몇 가락 안 되는 숱 적은 수염의 올들, 눈썹 밑쪽으로 둥글게 움푹 들어간 부위와 눈 아래에 늘어진 와잠(臥蠶)에는 여러 차례 유배생활을 겪으면서도 노론으로서 의리와 명분을 지켜내고자 했던 노대신의 옹골찬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현재 화폭에 표제가 적혀 있지 않아서 제작연도를 확실히 단정하기 어려우나, 함께 기증 받은 55세와 57세 때의 초상화의 얼굴모습과 비교해 볼 때 대략 60세 이후의 모습, 즉 1750년대 전반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관빈 초상(1745)경기도박물관

관리가 일할 때 가볍게 입는 담홍색 시복(時服) 차림의 조관빈 초상이다. 화폭의 상단에는 “동호조공오십오세진(東湖趙公五十五歲眞)‘이라는 표제가 있어 조관빈의 55세 때인 1745년에 제작된 초상화임을 알 수 있다. 조관빈의 호는 회헌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노년기에는 동호라는 호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분홍빛 도는 살구색의 얼굴에 붉은 입술, 한 올 한 올 섬세하게 표현된 턱수염, 그리고 눈가의 주름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외곽선과 이목구비가 좀 더 짙은 선으로 표현되었으며, 주름이 크게 잡히는 눈가와 팔자주름 부위에는 음영을 집어넣어 약간의 입체감을 살리고 있다. 시선을 내려 뜬 채 무표정한 조관빈의 모습은 화사한 홍색의 시복과 푸른색 서대의 밝은 분위기와 대비된다.

시복본 반신상은 이 작품 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덴리(天理)대학에도 전해오는데, 그 중 이 초상화가 가장 돋보이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조관빈 초상(1748)경기도박물관

이 초상화는 화폭 우측 상단에 적힌 ‘동호조공오십팔세진(東湖趙公五十八歲眞)’이라는 표제를 통해 조관빈의 나이 58세 때인 1748년에 그려진 초상화임을 알 수 있다.

검은 사모에 단령을 입고 있는데, 가슴에는 쌍학문양의 흉배를 부착하고 있으며 허리에는 서대를 착용하고 있다. 얼굴 표현은 조관빈의 다른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선으로 이목구비를 묘사하면서도 오목 들어간 부위에는 음영기를 집어 넣어 실체감을 표현하는 18세기 중, 후반의 화법이 구사되어 있다.

유지초본경기도박물관

유지초본: 완성도를 높이고자 하는 화가의 노력

유지초본(油紙初本)은 초상화 제작 시 화가가 비단에 정본을 그리기 전 초안과정을 보여주는 매우 흥미로운 자료이다. 정식으로 비단에 그림을 그리기 전에 미리 기름종이, 즉 유지에 밑그림을 그린 것이다. 현재 보이는 유지는 세월이 흘러 불투명한 갈색으로 변했으나, 제작 당시에는 비단과 같이 투명한 흰색에 가까웠을 것이다. 유지에 초상의 밑그림을 그린 것은 비단과 같이 반투명한 특성 때문이다. 유지에 초본을 그리면 뒷면에 칠한 채색이 쉽게 비춰 보이기 때문에 배채의 효과를 쉽게 가늠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유지초본의 결과를 통해 비단본의 결과를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초상화 제작과정에서 유지에 초본을 그리는 것은 가장 특징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유지초본, 제공: 경기도박물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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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지초본은 먹으로만 草를 뜬 상태로서 그림을 제작해가는 가장 첫 단계를 보여준다. 관복과 사모는 굵은 필치로 그렸으나, 얼굴 부분의 묘사는 매우 섬세하다.

유지초본, 제공: 경기도박물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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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복본을 입은 모습을 그린 유지초본이다. 먹으로 초를 잡은 뒤 사모부분은 검은 색으로 칠하여 좀 더 작업이 진행된 상태를 보여준다. 뒷면에는 얼굴 부분에 흰색 안료로 채색하였으며, 앞면에서 눈썹과 수염, 눈동자 등의 얼굴의 세부 묘사를 더해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유지초본, 제공: 경기도박물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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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초본경기도박물관

유지초본 세 점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얼굴과 사모뿐만 아니라 단령에도 채색이 되어 있다. 복식부분은 대강 그렸으나, 얼굴 표현에 있어서는 매우 공을 들여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비단에 그린 정본과 비교해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먼저 앞에서 먹선으로 전체적인 윤곽을 그린 상태에서 뒷면에 배채를 한 후, 다시 앞에서 세부적인 필치를 가하여 마무리하였다. 그림의 앞면에서 얼굴 부분을 살펴보면, 배채한 분홍빛이 얼굴 바탕의 기본적인 색조로 발색되면서 주름과 뺨을 어둡게 앞쪽에서 칠하여 은은한 입체감과 공간감을 살렸다.

초본의 뒷면을 보면 실제 정본에서의 채색 효과를 보기 위하여 배채한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얼굴 전체에 분홍기 도는 살색으로, 단령의 깃 부위에는 흰색으로 배채를 하였다. 관모 중간에 살색과 검정색 붓질 자국은 어차피 관모의 몸체 부분은 앞에서 진한 먹으로 칠하여 비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먹색과 살색의 배채 효과를 먼저 실험해 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세 점의 유지초본은 조선시대 초상화가 매우 계획적이고 치밀한 준비과정을 거쳐 제작되었음을 말해준다. 배채기법을 이용한 은은한 얼굴 묘사, 터럭 한 올까지 주인공과 가장 닮은 모습으로 그리기 위하여 기울인 화가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과정은 한국 초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매우 중요한 작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지초본, 제공: 경기도박물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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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관빈의 회헌집경기도박물관

화상찬, 조관빈이 남긴 초상에 대한 기록

조관빈의 문집인 『회헌집』에는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남긴 2편의 화상자찬(畵像自贊)이 실려 있다. 그 중 첫 번째 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관빈의 회헌집경기도박물관

爾貌何瘦 너의 모습은 여위었고
爾儀何拙 너의 행동은 서투르지만
瞭然其目 눈동자는 또렷하고
骯然其骨 골격은 굳세다네
飯蔬飮水 산나물을 먹고 물 마시니
山野之相 산야의 재상이고,
服緋拖金 비단옷 입고 금빛 관인(官印)을 지니고 있으니
宰相之樣 재상의 모습이라네
若有所悲 슬퍼하는 듯하니
悲者甚意 어찌하여 슬퍼하는가?
若有所憂 근심하는 듯하니
憂者甚事 어찌하여 근심하는가?
賢耶未耶 어진 모습인지, 아닌지
忠乎否乎 충성하는 모습인지, 아닌지
百世具眼 후대에 안목을 지닌 이라면
七分斯圖 이 초상화에서 헤아리리라

이 찬에는 의로운 행동으로 지조를 지키고자 했던 뜻을 초상화에 담아 후대에 영원히 전하고자 했던 그의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조관빈 초상(1745)경기도박물관

초상화에 남겨진 글

조관빈의 시복본 초상화 상단에는 다음과 같은 화기가 적혀있는데, 이는 『회헌집』에 실린 두 번째 찬의 내용과 동일하다. 1748년(영조24) 대궐에 초상화를 들여다가 왕이 친히 열람했음을 알 수 있다. 숙종어진의 모사도감이 설치되고, 당시 조관빈은 도감에서 제조를 맡았었는데, 아마도 이를 계기로 영조가 조관빈의 초상화를 보고 이에 조관빈이 화상찬을 쓴 것으로 보인다. 이 초상화를 본 영조는 “경의 모습은 맑고도 순수하다. 세월이 흘러 늙어가면서는 아버지의 모습이 많다”라고 하였다.

戊辰春, 自上命模寫都監, 取入家藏畵像御覽. 入侍時, 下敎曰, 卿貌淸而粹, 摸得依然老去, 多先相典刑. 覽圖, 有念舊之感, 恩敎鄭重, 不勝感泣. 作畵像自贊, 書諸軸上. 贊曰.

조관빈이 쓴 화상자찬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幅之像 한 폭의 초상화
猥經聖覽 외람되이 성상께서 보면서
曰像依然 모습이 의젓하고
貌粹神澹 외모는 순수하고 정신은 맑다고 하셨네
典刑猶存 선친의 모습이 여전히 있으니
念舊而感 옛날을 그리워하며 감회에 젖는다
世傳恩言 성상께서 내리신 말은 대대로 전해야 하리
勿壞勿黲 이 초상화를 망가뜨려서는 안 된다네

아교 더하기경기도박물관

초상화, 현재를 살다

조선의 유교적 문화 속에서 초상화는 단순한 감상을 위한 그림이 아니라, 주인공 인물 그 자체였다. 조관빈 초상이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 역시 양주조씨 가문의 후손들이 초상화를 자신의 선조라고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백 년 세월 동안 전쟁과 위기 상황 속에서도 초상화를 지켰고, 특히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양평 남한강 가에 있던 집이 떠내려가 몸만 간신히 피해야하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초상화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도 초상화에 대한 특별한 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관빈은 조선시대 사대부로서 의리와 신의를 지키고자 일생토록 노력했고, 자신의 초상화에 그 뜻을 담아 전하고자 했다. 후손들은 대대로 초상화를 지키며 선조의 뜻을 기리고자 하였다. 이에 경기도박물관에서는 초상화를 보존하고, 세상에 알림으로서 초상화의 전통을 지키고 그 뜻을 여러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제공: 스토리

전시 기획 : 이영은(경기도박물관)
전시 구성 : 김태용(경기문화재단)

참여: 모든 표현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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