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 이응노의 삶과 작품

예술가 이응노에 대하여

고암 이응노(20대)(1924/1933)이응노미술관

1904-1957: 도불(渡佛) 이전까지

1904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난 고암 이응노 화백은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현대식 교육보다 주로 서당에서 한문과 서예를 배우며 화가의 꿈을 키웠습니다. 이응노화백은 19세가 되던 해인 1923년 서울로 올라가 당시 ‘묵죽(墨竹)의 대가' 해강 김규진의 문하에 입문하여 문인화를 배우게 됩니다. '고암'이라는 호는 1933년부터 쓰기 시작했고, 그 이전에는 해강 김규진 선생께 받은 '죽사'라는 호를 사용했습니다.

이응노의 스승 해강 김규진이응노미술관

이응노화백이 해강 김규진 선생으로부터 사사한 문인화는 그림을 직업으로 하지 않는 문인의 심성과 교양을 나타낸 그림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용어입니다. 표현기법으로는 먹을 사용하여 간략하게 그린 후에 엷은 채색을 하는 기법을 주로 사용합니다. 사물을 꼼꼼하게 그리기 보다는 작가의 마음속 세계를 표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암 이응노(20대)(Lee Ungno in his 20s)이응노미술관

이듬해인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출품한 <청죽(晴竹)>이 입선하면서 미술계에 등단하게 되고,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법을 구사하기 시작합니다. <청죽(晴竹)>이라는 작품은 대나무 숲이 비바람에 흔들리는 움직임에서 강한 인상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1931년, 이 작품으로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 특선을 수상하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됩니다. ‘대나무’는 이응노화백이 화가로서 첫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해나가는 과정까지, 뿐만 아니라 프랑스로 건너가 추상미술의 세계를 추구하던 시기에도 함께 했던 가장 절친한 화우이자 이응노화백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1930년대 고암의 모습(1930s)이응노미술관

1935년 이응노화백은 일본 동경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이응노 화백은 가와바타 미술학교 동양화과와 혼고회화연구소 서양화과를 거쳐 일본 '남화(南畵)의 대가' 마쓰바야시 게이게쓰(松林桂月)를 사사했습니다.

고암 이응노(30대)(Lee Ungno in his 30s)이응노미술관

동경 유학시절, 서양화의 사실적인 표현방식을 접한 그는 점차 문인화의 관념성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1945년 전후(40대)(1945)이응노미술관

즉, 전통 필묵을 사용하되 서양화의 명암법과 원근법을 적용해 근대적 사실주의 시각을 드러냈습니다. 그 결과, 해방 후 그의 풍경화에선 대상을 강조하기 위한 과감한 생략과, 핵심만을 강조해 전달하는 특유의 표현법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경향은 점차 그림의 뜻을 전하는 방식으로 변화돼 1958년 프랑스로 가기 직전에 이르러서는 반추상화에서 완전 추상화로 발전합니다. 한편, 1945년 해방 무렵 서울로 돌아온 이응노화백은 장우성, 배렴, 김영기 등과 함께 일본미술의 잔재를 청산하고 우리 민족 고유의 한국화를 강조하는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을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남산에 ‘고암화숙(顧菴畵塾)’을 개설해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1948년부터 1950년까지는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교수로도 활동하며 후학들을 양성했습니다.

1958년 서울 중앙공보관에서 열린 고암 이응노 화백 도불전 전시장에서(1958)이응노미술관

1958-1959: 도불(渡佛)시기

1957년, 이응노화백은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갤러리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전>에 출품한 <출범>과 <산>을 록펠러 재단을 통해 뉴욕현대미술관에 기증하게 되고, 이로써 이응노화백은 세계무대 진출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1957년 뉴욕 월드하우스 갤러리 주최 한국현대미술전 작품선정 위해 내재한 푸셋티 여사와 한국 작가들(1957)이응노미술관

이듬해인 1958년, 그는 세계미술평론가협회 프랑스 지부장이었던 자크 라센느(Jacques Lassaigne)의 초청을 받아 54세의 나이에 프랑스 파리로 향했습니다.

1958년12월도불시기(1958)이응노미술관

동양화가인 이응노화백이 서양미술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전시를 연다는 사실은 큰 화제였습니다.

1958년 서울공보관 도불전, 1958, 제공: 이응노미술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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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개인전, 1959, 제공: 이응노미술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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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본 시립미술관 부부전에서 이응노와 부인 박인경, 1959, 제공: 이응노미술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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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뮤젠호프클럽 하우스 개인전(1959)이응노미술관

1958년 중앙공보관에서 열린 <고암 이응노 도불전>에 대한 미술인들의 기고가 연일 신문 지면을 장식했습니다.

1959년본 시립미술관 부부전, 1959, 제공: 이응노미술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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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전시주선 해준 서독대사 리하르트 헤르쯔박사이응노미술관

한편, 이응노화백은 도불 과정에 도움을 준 서울 주재 서독 대사 헤르츠 박사(Richard Herz)의 추천으로 파리 도착 일주일 만에 독일로 향하게 됐습니다.

1959년 쾰른 브와스레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당시 모습(1959)이응노미술관

그의 전시는 서독에 처음 소개되는 <한국의 현대미술전>으로 각종 언론에 소개되는 등 한번 더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1959년 프랑크 메인강(1959)이응노미술관

이 후 이응노화백은 1년간 프랑크푸르트, 쾰른, 본 독일 3개 도시에서 4차례의 순회전을 거친 뒤 다시 파리로 떠나게 됩니다.

고암이응노, 제공: 이응노미술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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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파리초창기 이응노와 부인 박인경, 1960, 제공: 이응노미술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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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문신과 파리에서(1960s)이응노미술관

1960년대 파리에서 문신과 이응노 화백

1960년대초 서예적 추상작업 캔버스에 화선지를 붙이고 수묵이나 다른동양화재료를 이용한 제작방식(1960년대)이응노미술관

1960년대: 파리에서의 이응노

1960년대 초, 이응노화백은 1년간의 독일 생활을 정리하고 파리에 정착했습니다. 1962년 당시 파리 예술가들의 선망의 대상, 폴 파케티 화랑(Galerie Paul Facchetti)에서 초대전을 열 뿐만 아니라, 전속작가 계약을 맺는 등 파리 화단에 성공적으로 안착했습니다. 파케티 화랑은 2차 대전 이후 유럽미술을 주도했던 앵포르멜(Informel) 미술과 서정추상미술을 이끌어가던 가장 전위적인 화랑 중 하나였습니다.

1962년 파케티 화랑개인전에서 고암(1962)이응노미술관

1962년 파리 폴 파케티 화랑에서의 첫 개인전

파케티 화랑에서의 첫 개인전 당시 이응노화백은 붓과 물감 대신 손을 사용해 잡지를 찢어 붙여 만든 콜라주(Collage) 작품을 선보였고 프랑스 화단과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1962년 파케티 화랑 오른쪽 세번째 고암, 왼쪽옆이 고암을 파리로 초청한 자크라센느(1962)이응노미술관

당시 파리 화단의 콜라주 기법은 종이를 오려 평면적으로 붙이는 작업이 주류였는데, 이와 달리 이응노 화백은 화면 위에 색을 칠한 종이를 덧붙이고, 붙인 종이를 다시 칼로 긁어내 촉각적인 효과와 함께 역동성이 느껴지게 했습니다.

1962년 파리 파케티화랑에서 첫 개인전(1962)이응노미술관

덧붙인 종이를 깎아가며 완성시킨 그의 콜라주는 파리 화단에서 독창성을 인정받았으며, 당시 유행하던 앵포르멜 추상에 대응하는 동양적 추상으로 높이 평가받았습니다.

왼쪽에서 부터 이응노 화백, 박인경 화백(그의 아내), 방혜자 화백, 이융세 화백(그의 아들)

구성, 이응노, 1962, 제공: 이응노미술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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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독일 뮌헨의 프리드리히, 달렘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도록표지, 1963, 제공: 이응노미술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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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독일 뮌헨의 프리드리히, 달렘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도록내지, 1963, 제공: 이응노미술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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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사건(1967)이응노미술관

한편,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명성을 쌓아가던 이응노화백은 1967년 이른바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약 2년 반 동안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창작에 대한 열정은 감옥에서도 멈출 수 없었고, 불굴의 의지로 약 300여점에 이르는 주옥같은 옥중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응노의 자화상(1968)이응노미술관

옥중에서는 간장과 된장을 재료로 삼아 화장지에 데생을 하고 밥풀과 종이로 조소 작품을 만드는 등으로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구성, 이응노, 1968, 제공: 이응노미술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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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이응노, 1968, 제공: 이응노미술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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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의 구성(1968)이응노미술관

이 작품은 한지에 먹으로 문자 추상을 그린 것이지만, 마치 옥고의 시절이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추상적으로 형상화된 문자들 주변에 간장을 안료삼아 덧바른 작품입니다. 간장은 먹과는 달리 종이에 닿을 때는 흑색이 아닌 갈색조를 띄며 먹처럼 듬뿍 묻어나는 안료가 아니어서 부분부분 간헐적으로 찍어 바른 흔적으로 화면에 드러나 있습니다.

1970년대 동양미술학교 학생들을 지도하는 고암(1970년대)이응노미술관

1970년대: 문자추상과 ‘파리동양미술학교’

이응노화백은 1960년대 중반부터 문자를 활용한 새로운 추상 작업에 몰두해 ‘문자추상’이라는 새로운 작품을 발표합니다.

고암 이응노이응노미술관

그는 어린 시절 서당에서 익힌 서예를 토대로, 자연의 형태를 추상화했습니다.

이융세의 이응노이응노미술관

음과 뜻을 획과 점이라는 조형적 형태로 표현한 한자에서 또 다른 동양적 추상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1974년 작업중인 이응노(1974)이응노미술관

초기 문자추상 단계에서는 주로 평면 위 상형문자와 같이 변형된 서체와 한지 위에 번진 수묵의 우연적인 효과가 어우러진 서예기법을 현대추상으로 재해석했다면, 후기 문자추상 단계에서는 문자 자체의 기하학적인 형상들을 해체, 변형해 재구성했습니다.

1972년 파리에서 개인전 준비중(1972)이응노미술관

1970년대 그는 한글과 한자가 가진 추상적인 패턴에 주목하고 이것을 다양하게 조합하면서 무수한 변주를 창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구성, 이응노, 1962, 제공: 이응노미술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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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이응노, 1964, 제공: 이응노미술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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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이응노, 1964, 제공: 이응노미술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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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세르누쉬미술관에서 열린 동양미술학교 기념사진(1971)이응노미술관

한편, 1964년 이응노화백은 세르누쉬 파리시립동양미술관(Musée Cernuschi) 내에 파리동양미술학교(Académie de Peinture Orientale de Paris)를 설립해 한국작가로는 유일하게 유럽인들에게 한국화와 서예를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이융세의 파리동양미술학교이응노미술관

파리동양미술학교는 세르누쉬 미술관장인 엘리세프(V. Elisseeff)와 함께, 아르퉁(H. Hartung), 술라주(P. Soulages), 후지타(Fujita), 자우키(Zao Wou-Ki)등 세계적인 작가와 국제적인 인사들의 후원 하에 설립됐습니다.

이융세의 파리동양미술학교이응노미술관

이는 유럽 내 설립된 유일한 동양미술 교육기관으로, 이응노화백은 파리동양미술학교를 통해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던 유럽인들에게 한국화를 보급하는 교두보 역할을 했습니다.

1971년 파케티 화랑에서 열린 개인전(꼴라주와 회화), 1971, 제공: 이응노미술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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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파케티 화랑에서 열린 개인전(꼴라주와 회화) 초대장, 1971, 제공: 이응노미술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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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제공: 이응노미술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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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호 화백과이응노미술관

오지호 화백과 함께

운보선생 내외와이응노미술관

김기창 화백 내외와 함께

평범해보이는 이응노화백과 그의 아내인 박인경 화백의 모습을 담은 이 사진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아내분(박인경 화백)이 입고 계신 흰 원피스의 문양들이 바로 이응노 화백의 작품이라는 사실! 이응노 화백은 냄비, 책장, 접시 등 재료를 가리지 않고 일상의 모든 물건을 작품의 재료로 활용했는데, 바로 이 옷도 그렇다는 사실이 정말 재미있지 않나요?

1976년 고암(1976)이응노미술관

1976년에는 파리동양미술학교 학생들의 작품 발표를 위해 파리 최초의 한인 화랑, ‘고려화랑’을 개관했습니다. 이응노화백이 작고한 후에는 부인인 박인경 화백과 아들 이융세 화백이 ‘고암 아카데미’를 통해 그의 가르침을 계속 이어오고 있으며 현재까지 약 3,000여명에 이르는 제자들을 양성했습니다. 또한 2014년엔 프랑스 파리 근교 보쉬르센(Vaux-sur-Seine)에 스위스 출신 건축가 장미쉘 빌모트(Jean-Michel Wilmotte)가 설계한 ‘이응노 아틀리에’가 개관했습니다.

이응노의 군상(1986)이응노미술관

1980년대: 군상 시리즈

이응노화백의 작품 속엔 언제나 인간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도불 이전, 사실적인 풍경화 속에 담겨있는 사람의 모습, 60년대 추상화 속에 나타나는 반 추상화된 인간의 형태, 70년대의 문자추상 속, 기호화된 형태로 등장하는 사람의 형태 등 인간에 대한 애정은 늘 그의 작품 속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응노의 군상(1988)이응노미술관

군상 작품은 주로 70년대 후반부터 이응노화백이 타계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초기 군상작품은 기하학적으로 단순해지거나 혹은 장식화 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1981년 고암작업모습(1981)이응노미술관

반면, 이른바 ‘군상 시리즈’로 불리는 후기의 군상 작품에서는 마치 붓으로 서체를 쓰듯, 인간 형상을 무수히 나열한 전면 구도의 작품이 두드러집니다.

80년대 프레 생 제르베 아틀리에(1980s)이응노미술관

특히 한 번의 붓놀림이 곧 한 사람이 되는 붓의 움직임이 무한히 반복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1980년대 아틀리에의 붓(1980s)이응노미술관

한지 위에 그려진 한 사람 한 사람은 이응노화백의 연륜과 필력에 의해 마치 살아 숨 쉬는듯한 기운을 느끼게 합니다.

1984년 작업 모습(1984)이응노미술관

군상 작품은 이응노화백의 인생관과 예술관이 집약적으로 담겨있는 고암 예술의 ‘대미(大尾)’라 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 동양미술학교 제자들에게 대나무그림 가르치고 있는 이응노(1980s)이응노미술관

1988년 파리동양미술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는 모습. 거의 대부분의 파리동양미술학교에 사진은 그의 아들인 이융세 화백이 찍었습니다.

1986 동경도미술관에서 열린 14회 인인전 도록, 1986, 제공: 이응노미술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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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동양미술학교에서제자들을 가르치는 이응노, 1988, 제공: 이응노미술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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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셍 제르베 아틀리에 앞에서, late 1980s, 제공: 이응노미술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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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예술대가들이 안장되어있는 파리시립페르라세즈 고암묘소이응노미술관

1989년과 그 이후: 고암 이응노, 파리에 잠들다

1989년, 이응노화백은 마침내 국내에서 해금(解禁)되어 호암미술관에서 대규모 초대전이 열리던 바로 그 때, 파리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이응노화백은 예술의 대가들이 묻힌 파리 시립 묘지 페르 라셰즈(Père Lachaise)에 안장됐습니다. 이응노화백의 서거 이후, 세르누쉬 파리시립동양미술관과, 대만 타이페이 시립미술관, 도쿄 아사히 갤러리 등 그의 삶과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추모전이 국내·외 각지에서 열렸습니다.

1980년대 프레 생 제르베 고암의 아틀리에, 이응노의 벽화가 남아있는 풍경(1980s)이응노미술관

현재 이응노 화백의 작품은 미국 뉴욕현대미술관과 프랑스 파리의 국립장식미술관을 비롯해 이탈리아, 영국, 스위스, 덴마크, 대만, 일본 등 전 세계 각국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1989년 세르뉘시에서 열린 이응노 추모전 도록(1989)이응노미술관

그 이후...

1992년에 프랑스 보쉬르센에 전통한옥 ‘고암서방(顧菴書房)’ 이 건립되었고, 2000년 2005년까지 운영된 이응노미술관이 서울 평창동에 개관하였습니다. 2012년 재단법인 대전고암미술문화재단이 출범했고, 2013년 이응노미술관 - 파리 세르뉘쉬미술관은 MOU를 체결했습니다. 2014년 '이응노 아틀리에'를, 2016년에는 신수장고를 개관하였습니다.

프랑스 파리 교외에 있는 소나무가 어우러진 한국전통기와집 고암서방, 제공: 이응노미술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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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박인경 부부이응노미술관

“내 그림은 모두 제목을 ‘평화’라고 붙이고 싶어요...

... 저 봐요. 모두 서로 손잡고 같은 율동으로 공생공존을 말하는 민중 그림 아닙니까? 그런 민중의 삶이 곧 평화지 뭐. 이 사람들이 바로 민중의 소리이고 마음이야. 요즘은 자꾸 이것만 그리게 되는데 사실 이걸 시도한 지는 오래 전부터지요. 감옥생활하기 전부터 생각했던 주제인데 감옥이 내게 자극을 주어서 형상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 셈이지요” - 이응노 (《일요뉴스》 1988년 10월23일). 인터뷰, 심재현.

이융세의 이응노이응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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