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04시,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북위 38도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하였습니다. 한반도는 1945년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이래 소련과 미국의 군정지역으로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3년 뒤 남북한은 각각의 정권을 탄생시켰고, 양측의 긴장은 결국 북한의 무력통일 시도로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다
공격을 오랫동안 준비해온 북한군과 달리 국군은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북한군과 국군의 주력부대는 서울 북방에서 격돌하였으나, 결국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게 패배하였습니다. 6월 28일 수도 서울을 빼앗긴 국군은 한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을 일주일 동안 지연시켰습니다.
1950년 7월 5일: 유엔군의 도착
북한의 침공 소식을 접한 미국 정부는 즉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28일 참전을 결정하였습니다. 7월 5일 미군의 첫 파병부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Smith)가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첫 전투를 치렀습니다. 북한군은 여전히 빠르게 남하하고 있었고, 국군과 유엔군은 더 많은 지원군의 도착을 기다리며 이들을 지연시켰습니다.
1950년 8월: 낙동강 방어선
1950년 8월 초, 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여 만에 북한군은 낙동강에 도달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의 마지막 영토를 빼앗으려는 북한군과, 이를 막으려는 국군과 유엔군의 격렬한 전투가 한 달 남짓 전개되었습니다. 9월까지 이어진 북한군의 최후 공세는 대구의 문턱에서 좌절되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유엔군사령부는 전세를 일격에 역전시키기 위해 북한군의 후방에 상륙작전을 감행하였습니다.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전투에 절정에 이르던 9월 15일 인천에 2개 사단을 상륙시켰고 28일 서울을 탈환하였습니다. 이로써 평양-서울-부산으로 이어지던 북한군의 주요 보급로가 끊어졌고, 북한군은 모든 전선에서 급격히 붕괴하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 10월 1일: 38도선 돌파
낙동강 방어선에서부터 반격에 들어간 국군과 유엔군은 2주 만에 남한 전 지역을 탈환하였습니다. 국군은 북한에 전쟁 발발의 책임을 묻고 한반도 통일을 이루기 위해 10월 1일 양양에서 최초로 38도선을 넘어 북진하였습니다. 곧이어 전 전선에서 북진한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원산 등 주요 도시를 탈환하고 한만국경으로 전진하였습니다.
1950년 10월 19일: 중국군의 개입
전세가 역전되자 북한은 소련과 중국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중국은 20만 여명의 병력으로 6·25 전쟁에 개입하였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은 한반도 최북단인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이르렀지만 중국군의 기습적인 참전으로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1950년 12월: 다시 후퇴, 그리고 흥남 철수
전쟁은 이제 새로운 적과의 싸움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비하지 못한 국군과 유엔군은 12월 14일까지 38도선으로 철수하였습니다. 함경북도에서는 중국군에게 포위된 미 제10군단과 함께 약 10만 명에 달하는 북한 피란민들이 흥남항을 통해 남으로 탈출하였습니다.
1951년 3~5월: 다시 시작점에 선 전선
중국군은 1951년 1월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남하하였으나, 북위 37도선에서 한계를 맞아 진격이 중단되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이 기회를 잡아 반격을 가하였고 이로써 3월에 서울을 재탈환하고 전선을 38도선 일대까지 북상시켰습니다. 이 시기에 확보된 전선은 앞으로 2년 간 계속될 고지쟁탈전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1951년 7월: 휴전회담의 개막
전쟁이 어느 한 쪽의 승리로 귀결될 수 없게 되자, 유엔측과 공산측은 개성에서 휴전을 위한 회담을 시작하게됩니다. 회담은 전투의 계속 여부와 외국군 철수, 포로교환 문제를 둘러싸고 2년 동안 지속되게 됩니다.
1951년 6월~1953년 7월: 고지쟁탈전
휴전회담의 결과에 따라 영구적인 분단선이 결정된다는 믿음 아래, 양측 군대는 좀 더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 들어갔습니다.주변 지역을 감제하는 고지는 전투의 주요 무대가 되었고, 밤낮으로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소모전이 계속되었습니다. 서쪽으로부터 후크고지, 노리고지, 불모고지, 백마고지, 삼각고지, 수도고지, 단장의 능선, 351고지… 수많은 고지에서 장병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952년 5월: 또 다른 전쟁, 포로수용소
이념의 전쟁은 전선이 아닌 포로수용소에서도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유엔군에 의해 사로잡힌 공산군 포로들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내에서 친공과 반공으로 갈려 서로 격렬하게 대립하였습니다. 친공포로들은 포로수용소장을 납치하고 포로 송환에 관한 문제를 내세워 휴전회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2년 간의 진통 끝에 군사분계선과 포로 교환 문제에 합의한 양측은 마침내 1,127일의 전쟁 끝에 정전협정을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국군 62만 명과 민간인 99만 명, 유엔군 14만 명의 인명피해를 내고 한반도 전체를 폐허로 만든 전쟁은 이렇게 ‘결론 없는 전쟁’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1953년~현재: 잃은 것과 얻은 것
고통스러웠던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앗아갔고, 상대에 대한 분노와 혐오를 뿌리 깊이 심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얻은 국제 사회와의 우정, 재생의 희망, 자유의 소중함은 값진 성취였습니다. 포성이 멎은 지 수십 년이 지나도록 전쟁은 끝나지 않았지만, 위기를 극복한 한국인들의 용기와 경험 역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